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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r 26. 2020

다시 쓰는 성경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와 소설 <태고의 시간들>이 건네는 구원


다시 쓰는 성경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와 소설 <태고의 시간들>이 건네는 구원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온다. 영화의 초점인물인 에아와 J.C의 대화인데, 에아는 오빠에게 어떻게 12명의 제자를 모았는지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한다. 오빠 J.C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모으고 적당히 기적 하나를 보여주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제자를 다 모았으면 새로운 신약성경을 쓰라고 덧붙인다. 에아는 오빠와 달리 남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다고 하자, 그러면 사도들의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 J.C나 에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도 자신의 이야기로 구성된 새로운 신약성경을. 에아와 J.C의 흥미로운 대화 시퀀스가 어쩌면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와 소설 <태고의 시간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전언같은 장면이 아닐까, 나는 궁리했다. 그러니까 전복이다. 영화와 소설 둘 모두 새로운 성경을 쓰면서 기존 세계를 전복한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정복한다. 그 세계의 예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고, 그곳의 성경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그렇게 창조된 세계는 인간이 ‘보기에 흡족할’ 수 있을까. 당겨 말하면 나는 갸우뚱했다. 익숙한 성경의 플롯을 재치있게 변주해내는 서사 진행 방식과는 별개로, 그 전망이 밝게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내가 그렇게 느껴졌는지 깊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전복하는 성경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이하 <이웃>)의 원제는 보다 직접적이다. <Le Tout Nouveau Testamant>, 직역하자면 ‘새로운 신약성경’. 그 성경에는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있을까. 영화는 성경의 구성을 비틀어 새로운 성경의 구성을 재창조한다. 첫째 챕터, '창세기'에서 신은 인간을 창조하는 것보다 고약한 법칙을 인간세계에게 제정하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욕조에 들어가기만 하면 전화벨이 울린다, 빵은 꼭 잼을 바른 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등등. 그러니까 신은 인간의 창조보다 인간의 곤경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 첫째 전복이다. 둘째 챕터, '출애굽기'에는 에아가 아버지 신의 집을 떠나는 장면인데 영화 상 ‘애굽’이 다름 아닌 신의 집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출애굽기의 둘째 전복이다. 마지막 챕터, 세계의 종말을 다루는 장면에서 영화는 본래 하고싶은 의도를 성취한 것처럼 보인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현재 세계의 종말과 도래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묘사하는 것처럼, 영화도 이 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전망한다. 그 세계의 신은 남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성의 모습을 입고 있다. 임신은 이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몫이 되었고, 여자는 임신한 남성에게 이렇게 묻는다. “다리 제모 안 할래?” 


   이러한 전복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 비틀기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어떤 비애감이 이 전복에 배어있다. 예컨대 신이 인간 세상에 수많은 재앙을 주는 장면이라든가, 딸 에아를 향해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든가. 그러니까 이들은 유희하려고 전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의 이 세계가 폭력적이고 부당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은연중에 고발한다. 폭력은 현상이고 폭력적인 남성 신은 근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에서 신은 여성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이 영화는 믿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신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라는 영화의 결말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구원을 받은걸까? 이 물음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신의 성별이 바뀐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적인 신이 세심하게 다스리는 곳이라 해서 과연 인류의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을까? 폭력적인 남성 신과 달리 여성적인 신 특유의 따뜻함과 은혜로, 만연한 세상의 죄를 정말로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영화를 다 본 뒤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독한 허무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뒷면에는 비애감이 깊게 배어있다. 산뜻하고 밝게 마무리된 영화의 표면 너머를, 안타깝게도 우리는 봐 버렸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전복을 한 번 더 전복하는 소설 

   소설 <태고의 시간들>(이하 <태고>)에서도 <이웃>과 비슷한 정서를 감각했는데, 그건 비애감이라기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함이었다. 그러니까 ‘무심함’에 가까운 감정. 이건 <태고>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전복’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는 궁리했다. <이웃>이 전복한다면, <태고>는 전복을 한 번 더 전복한다. <태고>는 먼저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전복하고, 또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라는 점을 전복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그 어떤 존재’인데, 어디에도 포획되지 않은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라고 이 소설은 믿는다. 그러니까 경계다. 자신의 정체성이 명징한 존재들은 이 소설에서 결국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지만, 경계선 위에 서있는 존재들은 한계 그 너머를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한계는 막다른 골목이고, 경계는 구분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도 신이므로 한계에 부딪히고, 인간도 인간이므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다만 신도 인간도 아닌 ‘크워스카’같은 존재만이 초연히 빛을 낸다.(크워스카는 성과 속을 오가는 인물이다.) 저자 올가 토카르추크는 그 경계선에 서있는 존재들을 깊이 응시한다. 이를테면, 소설의 제목인 ‘태고’라는 뜻도 ‘태초’, 또는 ‘오래전 시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소설 배경 상) 폴란드 내의 지명이기도 하다는 점. (이외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와 개인', ‘신화와 현재’, ‘직선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 등의 요소는 서로 대립하지 않음을 작가는 목표로 둔다.)


   이 점에서 나는 <태고>가 <이웃>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태고>에서 역시 우리의 세계는 전복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당위는 오늘 우리 세계의 비극과 고통에 근거를 두고 있고, 비극과 고통은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존재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태고>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고>의 시간적 배경은 제2차 대전 어간이다.) 그러나 <태고>는 <이웃>처럼 젠더의 변경으로 구원을 도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규정하면 그 존재는 즉시 자신을 규정하는 한계 안에 갇히지만,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면 그 존재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태고>는 믿는 편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신은 신도 인간도 아니(어야 한)다. 경계, 그 자체다. <태고>는 있는 힘껏 그 경계를 벌려놓는다. 어느 것도 그 무엇으로 포획될 수 없도록. 세계의 진실, 세계의 구원은 그 경계에서 출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태고>는 믿는다.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 최성은 옮김, 은행나무, 357쪽) 신은 지금 자신의 한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출처: pixabay



다시 쓰는 성경

   그러면 <태고>에서 최종 구원은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웃>과 같은 허무주의적인 결말이 될 것이다. “그 질서”의 세계를 규정하는 순간 그 세계의 한계 역시 생겨나기 때문에. 그러니 그 무엇도 아니어야 하고, 그 모두여야 한다. 각 존재를 규정하는 선이 포개어지는 그 순간, 세계의 진실은 그곳에 출몰할 것이다. 그럴 때 ‘나’라는 존재는 ‘자아’도 아니고 ‘타인’도 아닌, ‘주체’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되고, 동시에 모든 것도 아닌 그런 주체 말이다. 그렇다면 <태고>에는 그런 순간이 있는가?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미시아의 딸 아델카는 엄마가 생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그라인더를 아빠의 집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다. 직진하는 버스 안에서 아델카는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무연히 돌린다. 그라인더의 손잡이가 “태고의 축”, 그러니까 ‘시간의 축’이라고 한다면 아델카는 지금 시간을 돌리는 중이다. 시간은 미하우에서 미시아로, 미시아에서 아델카로 직진하며 흘러가지만, 동시에 미하우와 미시아, 아델카가 함께 경험하는, 반복하면서 돌아온다는 것. 그러니까 구원은 ‘-으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모든 것이면서 모든 것이 아닌 ‘-의 경계’, 또는 ‘언저리’의 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고요하게 말하는 장면이다. <태고>는 이렇게 자신만의 신약성경을 썼다. (20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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