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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01. 2020

한 인간의 탄생

한나 아렌트와 영화 <제8요일>(자크 반 도마엘, 1999)

한 인간의 탄생

한나 아렌트와 영화 <제8요일>(자크 반 도마엘, 1999)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에서 행위에 대해 그녀만의 독창적인 성찰을 제시한다. 그녀에게 행위는 ‘시작’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개념인데, 이것은 행위의 일반적인 의미가 ‘시작하다’(archein),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다’(275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게 만드는 능력이자, 하나의 ‘기적’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행동하면서 이전의 관성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시작의 힘을 아렌트는 ‘탄생’이라는 메타포에 연결한다. “탄생에 함축된 새로운 시작은 새내기가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할 능력, 즉 행위능력을 가질 때만 생각할 수 있다.”(85쪽) 탄생은 메시아적 구원을 자연스럽게 당겨온다. “달리 말해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써 할 수 있는 행위다. (생략)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말은, 복음서가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354쪽) 한 아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탄생하는 아이가 바로 메시아다.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제8요일>(1999) 정확히 아렌트적 탄생성의 실증적인 사례라고 나는 생각했다. 성공한 세일즈 기법강사인 아리(다니엘 오떼유)는 세일즈 기법 중 심리적 경계를 풀기 위해, 고객의 행동을 따라하라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점은 금방 눈에 띄어도 비슷한 점은 쉽게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로 자신에게서 실현되었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그와 달라도 너무 다른 조르주(파스칼 뒤켄)를 만나면서. 한밤 중 비 오는 도로 한가운데에서 온 몸이 젖은 조르주를 만난 아리는 동정심이 생겨 그를 자신의 차에 태우는데,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나자 어딘가 조르주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는 곧바로 동정심을 철회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아리가 조르주를 이상한(자신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근거가 조르주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말과 행동으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한다고 아렌트가 말했던가. 바꿔 말하면, 모든 인간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 자신의 고유성을 확증해준다는 것. 그러니까 한 사람의 고유한 말과 행동이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이라는 것. 



영화 <제8요일>



   모든 사람이 고유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타인에게 현상한다면, 타자와 주체는 어떤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두 사람은 말과 행동을 통해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아리와 조르주 사이에서 말과 행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 쪽은 아리 편으로 보인다. 조르주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아리의 것과 비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데, 조르주는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큰 것을 전부 포기하기 때문이다. 조르주가 지키고자 했던 작은 것은 사랑이지만, 아리가 얻고자 한 큰 것은 성공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것이 실은 큰 것보다 더 큰 것이라면? 사랑이 이루어질 조짐이 보일 때 온 힘으로 기뻐하고, 반대로 사랑이 좌초될 때마다 온 힘으로 슬퍼하는 조르주의 모습을 보면서, 아리는 자신의 삶에 나있던 거대한 구멍 하나를 비로소 깨달은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별거 중인 아내와 자녀들에게 뒤늦게 찾아가지만, 가족은 그를 완강히 거절한다. 그는 다시 깨닫는다. 모든 것이 한 발 늦었다는 것을. 그리고 처음으로 그는 진짜 울음을 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아리와 조르주가 포개어 보였다. 아리의 말과 행동이 조르주의 것과 처음으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아리가 이전에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아니, 적어도 그는 조르주처럼 사랑의 좌초로 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그제야 아리는 최초로 운다. 아리의 울음이 탄생하는 한 생명의 울음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칠까. 그러니까 그는 그 순간 다시 태어난 셈이다. 성공을 찬미하던 자신의 말과 행동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긴 조르주의 세계로 그는 드디어 한 발을 내디딘 셈이다. (이후 아리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조르주를 밀어내지만, 조르주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조르주가 좋아했던 무당벌레를 발견한다든지, 집에서 조르주가 취했던 행동을 똑같이 재현한다든지는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아리가 다시 태어난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있다. 마천루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조르주를 아리는목격하는데, 독특한 점은 그가 어떤 눈물도 흘리지 않고 고요히 응시할 뿐이라는 점이다. 화면은 잠시 어두워졌다가 꽉 막힌 출근길 도로를 비추는데, 사람들은 모두 경적을 울리며 불쾌감을 표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아리는 교통 체증의 원인인 쓰레기 수거차로 가 함께 일손을 거든다. 조르주가 할 법한 행동을 아리는 이제 하게 된 것. 그리고 이제 그는 영화의 결말에서 완전히 새로운 ‘아리’가 되어 영화를 완성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조르주가 읽었던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결말 시퀀스에서는 아리가 자신의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 “신은 여덟 째날 조르주를 만드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그러니까 조르주의 죽음이 아리의 결정적인 탄생을 가져왔다고 나는 믿는다. 아리는 이전에 한번 태어났으므로 이제 얼굴로 울지 않고 마음으로 운다. 그리고 행동으로 새로운 삶을 증명한다. 


   어떤 죽음인가. 조르주는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얻기 위해)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기꺼이 포기한다. 그는 그동안의 세계가 중요하게 여겼던 피상적인 것들(성공과 명예, 그리고 자본을 삶의 지표라고 여겼던)을 끌어안으며 함께 뛰어내린다. 텅 빈, 또는 서늘한 그의 존재방식이 그의 말과 행동을 목격한 사람에게 하나의 의문을 건넨다. 왜 그랬을까. 왜 스스로 몰락의 선택을 내렸을까. 세계는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잠시 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목격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의 좌표가 흔들리면서 이내 인정한다. 당신의 선택이, 행동이, 말이, 삶이 참혹하게 아름답습니다. 나도 아름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가져온 한 생명의 탄생이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한 행위의 기적, 즉 인간의 탄생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타인은 그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신은 타인의 말과 행동을 하라. 이것이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행위다. 이런 방식으로 한 아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다.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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