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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un 12. 2020

깊이 없는 영화

깊이 없는 영화




  우리가 문학에서 깊이를 감각할 수 있게 된 것은 근대문학의 원근법적 배치 덕분이라고 말한 사람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9) 서양 회화가 원근법을 도입한 이후 회화에서 깊이가 생겨난 것처럼 문학에서도 원근법적 배치로 인해 일종의 ‘깊이’가 생겨났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말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문학의 원근법적 배치’가 무슨 의미인가. 그에 의하면 근대소설이 깊이를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3인칭 객관묘사’ 덕분이라고 한다. “화자가 존재하면 (…) 현전성이랄까. ‘깊이’ 같은 것이 없어집니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미니마 퍼스펙티비아(minima perspectivia)’, 291쪽, 재인용) 그러니까 3인칭 객관묘사가 깊이를 도입한 것이다. 그렇게 확립된 ‘깊이’로부터 근대소설의 리얼리즘, 그러니까 ‘현실’이 탄생했다. 나는 이 논의를 그대로 가져와서 영화에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영화의 ‘원근법적 배치’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내가 겨냥하는 것은 각 쇼트마다 소실점을 기준으로 구성된 화면 상의 구도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화면이 아니라 화자다. 근대문학의 원근법이 전근대적 1인칭에서 근대적 3인칭으로 이동한 화자에서부터 시작한 것처럼 영화에서도 화자의 역할에 따라 영화의 ‘깊이’가 깊어질 수도, 얕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다. 그렇다면 우선 영화의 ‘화자’를 먼저 규정하는 것이 첫 번째 과업일 것이다. 영화의 화자는 누군가. 나는 그것이 ‘카메라’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구축되어 있다. 대체로 많은 영화는 카메라의 존재를 태평하게 숨기며 ‘3인칭 객관묘사’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영화는 카메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관객의 시선이 아니라, 마치 현장에 함께 있던 누군가의 응시처럼. 




영화 <레버넌트>



   이렇게 구분해보면 어떨까. 카메라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영화는 3인칭 객관묘사 형식으로서,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면이 강화된다. 반면, 카메라가 스스로를 적극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이것을 ‘카메라-화자’라고 하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화자가 생략된) ’원근법적 배치’에 의해 깊이를 확보한 영화이지만 후자는 ‘카메라-화자’가 바라보는 1인칭 주관묘사 형식의 평평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시작한다. 카메라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숨기든 그렇지 않든, 사실 모든 영화는 애초부터 ‘누군가의 시선’으로 구성된 1인칭 시점이 아닌가? 가라타니는 화자가 존재하면 현실감이 사라지고 깊이가 없어진다 했는데, 1인칭의 시점으로 구성되는 영화라는 매체는 본래부터 깊이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인칭 시점이라 해도 그 시선은 못 보는 것이 없는 3인칭 객관 시점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시점의 변경이 자유롭다. 예컨대 집 한 채를 촬영하는 것도 정면에서 바라보는 쇼트, 측면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쇼트 등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 시선들은 3인칭 객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1인칭 시점이 3인칭의 속성을 갖고있다고 한다면 이런 문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영화의 1인칭 시점은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한다고. 그러니까 카메라는 세계의 소실점이다. 이것을 카메라적 소실점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영화의 원근법은 카메라적 소실점에 의해 깊이를 획득한다. 그 세계는 카메라가 구성한 또 하나의 ‘현실’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카메라적 소실점’이 설정되어 있지 않거나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소실점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영화는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다. 현실은 그곳에 없다. 카메라적 소실점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영화는 어떤 것인가. 카메라의 시선이 분열되어 있거나(1인칭이었다가 2인칭이었다가, 3인칭을 오가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카메라가 포착하거나, 아예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어 있거나 하는 영화다. 이런 영화들은 가라타니의 표현에 의하면, '깊이가 없는 영화’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현실이 아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반대로 여기에 실재가 있다, 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실재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즘이라는 믿음을.


   영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문학을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 건가 싶다가도 이 논의의 출발 자체가 문학에 빚지고 있으므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깊이 없는 시’라면 김민정 시인의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나는 팬티도 벗어던졌다.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곤약같이 껍질 벗긴 흰 살점 덩어리, 이마저도 체증이 일어 나는 펄펄 끓는 기름 솥단지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백 살 노파의 미주알처럼 겹겹의 허물이 벗겨졌다 입혀지고 까졌다가 딱지 앉더니 유면위로 샛노란 튀김옷의 그녀가 솟구쳐오르는 것이었다. (생략)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손이 없는 고등어 부인이 날개 같은 지느러미로 비질을 끝냈을 때 쓰레받기 위에는 말린 고추처럼 고부라진 황금빛 열쇠들로 수북하였다.

- 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 부분


   이 시에서 시점의 변화는 천연덕스럽다. ‘나’에서 시작한 시는 어느새 ‘고등어 부인’으로 변모한다. 소실점은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거나 움직인다. 소실점에 지탱하던 원근법은 여기서 무너지고 현실과 환상은 이곳에서 중첩한다. 말하자면 시인은 소실점을 지우면서, 지워진 소실점 자체가 시의 소실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가 몇 인칭 시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시점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시의 세계가 현실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시점으로 새롭게 구성된 또 다른 ‘현실’이 시 속에 있다. 시인은 그곳에 ‘나’라는 따분한 자아 대신 새로운 ‘주체’를 창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향의 배면에는 이곳은 실제(reality)가 아니지만, 실재(the Real)의 장소라는 걸, 굳게 믿는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깊이 없는 영화, 깊이 없는 시.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깊이 없음’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흔히 본질이라는 것은 심층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간신히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것이 일종의 통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본질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에 있다고 그들은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본질(진정한 나)이 아니라 창조(새로운 주체)이며, 깊이가 아니라 가능성인 것인지도 모른다. 심연이 아니라 표면에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 가능성을 모색하는 영화들. 그러니 어떤 영화들은 더 이상 깊어지면 안 된다. 표면에서 넓어져야 한다. 그곳에서 영화는 얕지만 아득할 것이다. (202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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