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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un 30. 2020

깊이 있는 영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도달한 심연, 그리고 탄생

깊이 있는 영화("영화의 깊이"의 보론)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도달한 심연, 그리고 탄생




  지난 글(“영화의 깊이”, 아트렉처, 2020-06-12, https://artlecture.com/article/1697/#%EC%98%81%ED%99%94%EC%9D%98-%EA%B9%8A%EC%9D%B4)에서 나는 가라타니의 논의를 빌려와 ‘영화의 깊이’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런 문장이 된다. 영화의 깊이는 카메라적 소실점에 달려있는데, 카메라적 소실점이 애초부터 설정되어 있지 않거나 시점이 고정되지 않아서 소실점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영화는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다. 카메라적 소실점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카메라의 시선이 분열되어 있거나,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카메라가 포착하거나, 아예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어 있거나 하는 영화”다. 그런 영화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이며, 본질(진정한 나)이 아니라 창조(새로운 주체)며. 깊이가 아니라 가능성에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싶다. ‘표면, 새로운 주체의 창조, 가능성’과 같은 가치들은 ‘깊이 없는 영화’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깊이 있는 영화에서 그런 가치들이 발생하는 경우는 없을까?  지난 글에서 나는 깊이 있는 영화와 깊이 없는 영화,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벌어진 간격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시도를 해볼 것이다.


   간격을 줄이기 위해선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기준이 새롭게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카메라적 소실점이 고정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실은 고정되어 있던 영화’. 나는 이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로 한 영화를 떠올렸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2015)를. 처음 이 영화를 관람했을 때만 해도 나는 카메라적 소실점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실은 어느 영화보다 카메라적 소실점이 확실히 고정되어 있다고. 왜 내가 처음에는 그렇게 느꼈고, 다음에는 달라졌는지, 어떤 면에서 카메라적 소실점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차례로 말하려 한다.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유령의 시선으로 유영하는 카메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이냐리투 감독은 <버드맨>에서 호흡을 맞췄던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과 이 영화에서 재회했다.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버드맨>에서처럼 <레버넌트>에서도 유려한 카메라 무빙을, 압도적인 롱테이크 신을 보여준다. 더욱이 자연광을 쓰기 위해 하루 2시간 정도의 빠듯한 촬영으로 이토록 경이로운 결과물을 보여준 것에 놀라웠다. 보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오다가 한 지점에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주인공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날숨이 카메라 렌즈에 닿으면서 생긴 희뿌연 성에를 봤을 때가 그렇다. 카메라의 존재가 그 순간 명료하게 드러나버렸다. 이 점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레버넌트>의 영화적 기획과 달라지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관객은 영화로부터 멀어지고,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존재(카메라)가 투명하게 드러난 순간이다. (그러나 카메라 렌즈에 맺힌 성에로 인해 오히려 현장감이 극대화된 효과가 발생했다는 점이 역설적이라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카메라는 왜 그 순간 자신을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었을까. 나는 보다 현상적인 의문을 생각했다. 3인칭 객관시점으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았던 <레버넌트>의 카메라는, 왜 그 순간 1인칭 시점으로 바꾸었을까? 송경원 영화평론가는 <레버넌트>의 카메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다. “어지럽다 해도 좋을 이 같은 카메라가 남기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관찰자의 부재다. (생략) 하지만 <레버넌트>의 이 시퀀스에는 시선이 부재한다. 비인칭적인 시점도 아니고 1인칭도 아니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카메라다.”(송경원, “서사를 잃고 헛돌다”, 씨네21, 2016-01-28,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2914) 나도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느꼈는데, 다시 관람하고 나니 내 생각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화를 변호하고 싶어 졌다. <레버넌트>에는 시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휴 글래스는 영화 중간중간마다 유령을 목격하던 사람이다. 죽은 아들의 망령이라든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망령이라든가. 영화의 말미에서 죽은 아들의 복수를 완성한 휴 글래스는 아내의 망령을 응시한다. 아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사라진다. 휴 글래스는 아내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본다. 거기서 화면은 어두워지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나는 휴 글래스가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지점에 초점을 두고 싶다. 휴 글래스는 누구를 보는 걸까. 관객과 눈을 마주치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휴 글래스가 영화 내내 망령을 응시했던 사람이라는 서사적 문법을 생각한다면, 그 순간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또 다른 ‘유령’(레버넌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령은 그 순간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유령은 영화의 처음부터 휴 글래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총알과 화살이 날아다니는 소요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존재, 멀찍이 떨어져 자연을 관조하다가도 일순 인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인물이 내뱉은 희뿌연 숨결마저 감각할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레버넌트’(유령)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시점은 비인칭이거나 3인칭 객관이 아니라, 유령의 1인칭 시점이었던 것이다.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그 유령의 정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냐리투 감독이 이 영화에서 레버넌트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조해낸 것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카메라의 시선을 분열시키지 않아도, 오히려 카메라적 소실점을 고정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주체를 창조했다. 레버넌트는 휴 글래스와 함께 모든 수모와 곤경을, 죽음과 생을 견뎠다. 빗발치는 총탄과 화살을 맞은 사람들의 붉은 피가 새하얀 눈 위에 뿌려지는 걸 지켜봤다. 모든 사건과 시간을 그와 함께해 온 존재가 있다는 것을 휴 글래스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았다. 


   새로운 주체는 왜 유령이어야 하는가. 유령은 본질적으로 생사의 경계에 걸쳐있는 존재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양쪽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유령은 죽은 존재이지만 살아있고,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다. 또한 유령은 땅 위의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메시아적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비천함을 그대로 간직한 혼령도 아니다. 인간의 일에게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그저 관조만 하고 있는, 때때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는 존재. 휴 글래스는 지금까지 위태롭게나마 지속된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레버넌트에게 지탱해왔었다는 걸, 영화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영화가 ‘유령’을 어떤 존재로 그리는지,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유령은 ‘인간의 신적인 순간’이 아닐까, 라고. 유령은 곤경에 처한 인간에게 손쉽게 구원과 초월을 건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은 한낱 짐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유령은 끊임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와 휴 글래스 앞에 현상한다. 당신은 혼자 무거운 삶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며 말해주기도 하고, 인간의 삶에는 생존하는 것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기도 하면서. 그렇게 인간이 비록 찰나이지만 신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바로 유령(레버넌트)이라고 이 영화는 믿는다. 덕분에 우리는 휴 글래스에게서 인간-유령의 경계를 오가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영화는 심층이 아니라 표면에서 자신의 양태를 바꾸면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모색하지만, 어떤 영화는 존재의 심연으로 깊게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주체를 잉태하기도 한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정확히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다. 그러니 어떤 영화들은 더 깊어져야 한다. 아래로, 아래로. (2020. 6. 29.)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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