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심히 그라인더를 돌리고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

by 이정식

우리는 무심히 그라인더를 돌리고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




작년 겨울에 출간한 졸저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의 일부다. “모두 2019년 한 해동안 쓰인 글을 모으고 가능한 수준에서 손 보았다. 글의 주제에 따라 사랑과 삶(1부), 예술(2부), 사회(3부), 윤리(4부)로 각각 배치하면서 나는, 올해 어떤 주제에 내 관심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책의 구성을 4부로 엮을 생각도 없었고 각 구성의 주제 역시 그것이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한 해동안 쓴 글을 모아놓고 보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4가지로 추려진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2019년 한 해동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구나, 라는 자각을. 김진영 철학자의 글을 보니, 벤야민은 이러한 자각의 순간을 ‘별자리적 사유’라고 이름붙였다 한다. 별자리를 보면서 나는 자꾸 금을 긋지만 그 행위는 어떤 의도 없이 한 것인데, 어느 순간에 내가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 또렷해지고 별들도 어떤 선으로 모이려고 했는지 명료해지는 찰나의 순간.(김진영,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포스트카드, 2019년, 319쪽) 그러니까 무심하게 흩어져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나열이 나열이 아니라 (어떤 목적성을 가진) 배열이구나, 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그런 ‘별자리적 사유’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2019년에 내가 글을 묶으면서 적은 저 문장은,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별자리적 사유의 순간’을 거친 뒤에 쓰인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태고의 시간들>의 올가 토카르추크의 기획이 어쩌면 ‘별자리적 사유의 순간’을 거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등장하는 인물도 시간도 그렇다. 총 84개의 에피소드가 촘촘히 배열된 이 책에는 일반적인 큰 줄기의 서사 진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에피소드마다 중심 화자가 있고, 그 화자의 시각에 감각되는 삶의 풍경을 독자는 따라 응시한다. 요컨대 이 소설의 기둥은 서사가 아니라, 화자들 저마다의 ‘시선’이다. 왜 (이 소설의 기둥이) 시간이 아니라 시선이어야 하는가. 토카르추크에 의하면 시간 또한 우리의 응시로 포착할 수 있는 물성을 가진 어떤 대상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첫 에피소드는 ‘태고의 시간’인데, 그는 집요할 정도로 공을 들여 태고라는 공간의 윤곽을 묘사한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남에서 북까지 태고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린다.”(5쪽) 특이한 점은 ‘태고’라는 지명 내에 존재하는 풍경을 묘사하지 않고, 태고의 ‘윤곽’을 묘사한다는 것. ‘태고’의 의미가 오래된 시간, 원시의 시간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작가는 지금 시간의 윤곽을 우리 눈에 감각할 수 있도록 가시적인 물성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소설 내의 규칙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크워스카는 이렇게 게노베파를 바라봤다. “바로 그때 크워스카가 눈을 번쩍 뜨고는 게노베파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니, 눈이 아니라 게노베파의 영혼, 그 내면을 꿰뚫어 보았다.”(32쪽) 한편 미시아의 시선은 이렇다. “당시 방앗간은 미시아에게 시작도 끝도 없고, 밑바닥과 꼭대기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방앗간을 다르게, 이성적으로 보게 되었다. 의미와 형상을 가진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50쪽)



시선

미시아와 크워스카, 두 사람의 시선은 같으면서 다르다. 둘은 모두 세상을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게 됐다는 점에서 같고, 그 응시의 결정체가 둘에게 각각 다르게 맺혔다는 점에서 다르다. 크워스카는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게 되었고, “우리의 위와 아래에 펼쳐진 또 다른 시간과 또 다른 세계의 윤곽들도” 보았다. 반면 미시아는 정반대로 사물을 “의미와 형상을 가”진 “구체적인 대상”, 즉 “이성적”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 크워스카의 시선을 신적 또는 천사의 시선이라고 하고, 미시아의 시선을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근대적 주체의 합리적 시선이라고 구분하면 어떨까. 크워스카는 거대한 여인의 터치로 인해 몸 구석구석이 신성해졌고 불멸이 되었다. 그러나 미시아는 “새삼스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걱정하”고(253쪽) “시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여느 다른 존재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 일반의 모습과 같다. 그런 미시아에게 그라인더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라인더는 무엇인가. “그라인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는 있다. 그라인더는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고, 또 “현실의 축”,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것이면서, 나아가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라인더는 시간(현실)의 축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독특한 시간관이 나오는데, 토카르추크는 시간이 본질적으로 선형적이면서 동시에 원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돌면서 반복한다. 원형적인 순환의 표상인 그라인더가 미시아의 손에 쥐어졌다는 것은, 시간을 직선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작고 사소한 구원같은 것이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델카가 버스에 앉아 어머니의 그라인더를 천천히 돌리는 장면은 두고두고 인상적이다. 시간은 이렇게 앞으로 흐르고 있고(미시아에서 아델카로), 또 시간은 이렇게 돌면서 반복한다(미시아와 아델카가 동일하게)는 듯이.


그리고 토카르추크의 시선이 있다. “프로이트를 읽고 난 이후로 세상을 더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었다. 내 인식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세상을 일대일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봤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368쪽) 잘 알지 못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모든 사물을 성적 상징으로 변환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와 사건들에 무의식적인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매개돼 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다. 그러니 그녀의 시선은 크워츠카(무의식)와 미시아(의식)의 시선의 혼합이다. 합리와 비합리의 교차며, 직선과 순환의 역설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든 요소의 양극적 관계는 대립하지 않고, 역설의 형태로 혼합되어 존재한다. 나는 이 점에서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이 떠올랐는데, 김진영은 알레고리 개념을 풀어서 이렇게 설명한다. “알레고리는 파괴와 생성, 무의미와 의미, 몰락과 구원, 무상성과 영원성, 고대성과 근대성 등의 양극적 대립개념을 극단적으로 껴안으며 밀고 나가 그 극점에서 논리적이 아니라 모순적으로 전복의 순간을 도래케 하는”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양극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대립이 아니라 관계다. 그 알레고리 관계의 극점에서 모순된 개념이 충돌하는 순간 오히려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도약한다는 것. 그러니 그는 모순되는 양극성의 관계를 통하여 모종의 구원을 도모하려던 것이 아닐까.





시간

그래서 우리는 이지도르를 주시해야 한다. 그는 등장인물 중에서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유의미한 성취를 거두었는데(세상은 ‘4개의 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 얼마 못가 그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러자 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불안감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는 빠르게 생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숨을 거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세상을 합리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근대적 기획이 몰락해 버리고 말았던 우리의 역사가 포개져 보였다. 이성으로 도약을 도모했던 근대적 인간의 우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인가. 다시 벤야민을 가져오자. 그는 그 모순이 양극적으로 충돌하면서 전혀 새로운 시간이 도래한다고 말했다. 무슨 시간인가. 바로 “지금 여기의 시간”(Jetztzeit). 직선과 순환의 시간이 충돌하면서 무심하게 건네는 현재라는 구원. 직선과 순환의 모순된 나열로부터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힌 '별자리적 사유의 순간'. 그것이 바로 그라인더를 돌리는 아델카의 모습에 맺혀있는 표상이 아닐까.


이지도르의 몰락은 몰락이 아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복한다. 우리는 전진하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만 소멸되지 않고, 시간을 반복하지만 갇혀있지 않다. 그 도래의 순간이, 모종의 구원의 순간이 우리의 현재에 '모순-논리'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양극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에 짙게 배어있는 성공과 실패, 꿈과 좌절, 비합리와 합리 그 모두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라인더를 무심하게 돌리는 일이다. 그라인더로 과거와 현재를 갈아야 한다. 우리의 사소한 성취와 비참한 몰락을 함께 넣어야 한다. 타인에게 가닿지 못한 말과 마음을, 매순간 망설이거나 뒤뚱거리는 행동을 함께 넣어야 한다. 삶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돌아간 그라인더에서 추출된 한 잔의 커피에 배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토카르추크는 믿는다. 그러니 이 소설에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장의 제목은 ‘커피의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2020. 3. 17.)



덧, 이 소설은 총 '365'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내 시간을 다루는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한국어판에서만 볼 수 있는 우연의 소산인지 또는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가의 작품에는 이런 사소한 우연으로도 어떤 법칙이 연상되는 '별자리적 사유의 순간'의 여지가 풍성하다.


<태고의 시간들>을 읽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