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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24. 2019

언어는 무엇인가? <고찰>

치료로써의 철학, 비트겐슈타인과 나가르주나

청년 비트겐슈타인장년 비트겐슈타인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언어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의미를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에서 찾으려고 했다면, 장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것의 사용 방법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림이론'에서 '게임이론'으로의 전회라고 불릴만한 단절이다. 언어관의 결정적인 변화로 인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도 현격하게 변화된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또한 그것의 기초를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플라톤에서 시작된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단호한 거부다. 철학은 세계에 기초를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아니,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플라톤칸트러셀도 그리고 청년기의 자신도 세계에 통일된 기초를 제공하는 철학적 용어들, 즉 개념들을 제공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혼동만 가중시킬 뿐 아닌가?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철학자로서 자기 속죄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을 병들게 했다고 진단했고, 그걸 치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으로 제안했던 것이 바로 "언어의 실제 사용을 기술하는" 것이다. 칸트나 피히테, 혹은 헤겔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의식'과 관련된 예를 하나 살펴보자.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의 전체는 한 방울의 언어 이론에 응축된다.)"

최종적으로 자기 인식으로 수렴되는 근대철학의 관념론에 쇄기를 박는 판단이다. 일상적 언어 사용을 보자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지적대로 아무도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의식이란 개념 자체가 삶과 무관한 허구적인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 전체"를 한 방울의 빗방울로 만들어 날려버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개념의 형이상학적 사용으로 세계와 인간을 뒤죽박죽 만들었다면, 이제 철학자는 실제 언어 사용법을 기술해서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만드는 착시효과를 제거해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눈에는 청년기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철학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지적 혼동을 가라앉히기보다는 그걸 더 가중시켰던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악한 의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도 '존재', '본질', '현상', '지각', 등등의 개념에 지적 혼동을 겪었고, 이런 혼동이 타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자들이 어떤 하나의 낱말─지식, '존재', '대상', '자아', '명제',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애쓸 때,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즉 대체 이 낱말은 자신의 고향인 언어 속에서 실제로 언제나 그렇게 사용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그것들의 일상적 사용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다."


개념들의 "형이상학적 사용 metaphysical use"과 "일상적 사용 everyday use"! 이것보다 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개념에는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사용"이라면, "일상적 사용"은 개념을 포함한 모든 언어를 '언어 게임'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이 형이상학적 사용을 대표한다면,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은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을 비판하고 일상적 사용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었던 셈이다. 물론 언어 게임이란 비유를 아무렇게나 시작하고 아무렇게나 끝낼 수 있는 일상적인 게임처럼 가볍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게임이란 비유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게임에는 암묵적으로 주어진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설명했던 것이다.

"'언어 게임'이란 낱말을 여기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양식의 일부임을 부각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언어를 형이상학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적인 용법으로 사용하라! 그렇다면 언어로 발생하는 모든 혼돈과 착각,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었다.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속내가 중관 불교의 창시자 나가르주나 Nāgārjuna, 龍樹 (150?~250?)의 문제의식과 그대로 공명한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는 초월적 존재인 브라흐만이든 아니면 불변하는 개별 자아인 아트만을 맹신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고통과 번뇌로 물들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무아론 無我論을 역설했던 이유이다. 싯다르타 사후 등장한 소승불교 전통이 문제가 된다. 다양한 학파로 분화된 소승불교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아무론과 상충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지적이고 이론적이었던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가 중요하다. 글자 그래도 그들은 '모든 것一切이 존재한다有'고 주장했던 학파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들이 존재한다고 말한 '모든 것'은 싯다르타가 말한 개념들, 혹은 경전의 개념들이라고 해야 한다. '번뇌煩惱', '열반涅槃',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 싯다르타가 말한 개념들은 모두 지시체 referent가 명확히 있다는 입장인 셈이다. 청년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에서 했던 것을 성일체유부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형이상학적 사용'을 비판하기 위해서 나가르주나는 ≪중론≫을 집필하게 된다. 바로 이때 중요한 개념이 공空이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개념들에는 자성 自性, svabhāva, 즉 불변하는 본성을 지닌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론≫에서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여러 인연으로 발생한 존재를 자는 공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발생한 존재는 또한 관습적인 이름에 불과할 뿐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의 의미이기도 한다."


개념뿐만 아니라 개념의 지시체도 그 자체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바로 '공'이다. 모든 것은 다양한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번뇌도, 열반도 공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번뇌가 있으니, 그것이 소멸된 상태인 열반도 가능한 법이다. 또한 열반이 있으니, 우리는 자신이 번뇌의 상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다. 이렇게 번뇌와 열반은 개념 차원에서나 그 지시체 차원에서 의미론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번뇌는 번뇌이고 열반은 열반이라고 두 개념을 분리하고, 나아가 각각의 개념은 불변하는 지시체를 갖는다고 믿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르주나가 '번뇌'나 '열반'이란 단어를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관습적인 의미에서,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빌리자면 "일상적 사용"으로 번뇌니 열반이란 말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중도中道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언어를 사용할 때 "형이상학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중론≫에서 나가르주나는 형이상학적으로 사용된 불교 개념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불교의 개념을 포함한 모든 개념의 지시체에는 불변하는 본성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것이 불교라면 개념에 대한 집착만큼 위험한 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설일체유부처럼 아주 지적인 불교 학자 집단에게는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중론≫은 당시 인도 민중들이 아니라 지적으로 배운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긴 글도 모르고 이해력도 떨어지는 민중들이 개념적 집착에 빠질 리 만무한 일일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공 개념마저 자기 동시대 지성인들이나 혹은 후대 지성인들에게 지시체가 있는 개념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론≫에서 나가르주나는 경고했던 것이다.

"위대한 싯다르타가 공의 진리를 이야기한 것은 여러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다시 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부처가 와도 이 사람을 바로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어떤 형이상학적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가르주나에게 불교의 목적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목적은 집착에서 발생하는 삶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그러니까 개념의 "형이상학적 사용"을 "일상적 사용"으로 돌리는 데 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의 공 개념도,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도 모두 '형이상학'에 사로잡힌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치료제, 즉 약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불교, 특히 나가르주나와 유사한 철학관을 피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우리의 말의 사용을 위한 규칙 체계를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정화하거나 완전하게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명료성은 물론 완전한 명료성이지만, 그러나 이는 단지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일 뿐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철학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방법들은 존재한다. 마치 다양한 치료법들처럼."


결국 건강한 심신으로 우리가 잘 살고 있다면, 한마디로 말해 문제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나가르주나도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도 우리에게 그윽한 미소만 보낼 것이다. 반대로 삶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 탓이라면, 나가르주나와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적절한 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 개념에도 다시 집착할 수 있는 것처럼 게임이론에도 다시 집착할 가능성은 지식인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실제로도 중관학파도 생기고, 비트겐슈타인 학파도 생기지 않았는가?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자!"는 표어가 있다. 위장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의사가 위장약을 주었다고 하자. 당연히 그의 위장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고통이 사라진 사람은 위장약으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집착할 수 있다. 치통이나 생리통 등 다른 고통이 와도 그는 위장약을 먹으려고 할 것이고, 아예 평상시 아프지 않아도 위장약을 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장병의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이 그에게 찾아올 것이고, 이럴 때는 의사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문화와 가치 Culture and Value≫에 등장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생각해보자. "문이 폐쇄되어 있지 않더라도, 안에서 열리게 되어 있더라도, 어떤 사람이 그 문을 밀치는 대신 잡아당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방 안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계속 문을 밀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지친 채로 방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문은 밀어야 열린다는 선입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방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집착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경우 치료제는 '잡아당기세요!'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이 가르침으로 무사히 방에서 탈출한 이 사람에게 진정한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방에 갇힐 때마다 그는 잡아당기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을 '잡아당기는' 것은 방을 탈출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다양한 치료법들"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세기 초 인도에서 활약했던 핑갈라 Pingala, 한자문화권에서는 청목靑目이라고 불리는 이 불교 학자는 ≪중론≫의 주석에서 말했던 적이 있다.

"비유하여 말한다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에 따라 약을 복용하면 치료할 수가 있는데 그 약으로 다시 병이 생긴다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가르주나와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담론은 치료제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고통을 낳은 질병을 치료하듯, 두 사람은 문제에 빠진 삶을 치료하기 위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질병들이 다양한 것처럼 우리 삶의 문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치료제도 그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만일 공이라는 개념이나 게임이론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했다면, 두 사람의 철학은 모두 그토록 비판하고자 했던 개념의 "형이상학적 사용"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사람은 돌팔이 의사는 아니었다. 능숙한 내과의사처럼 두 사람은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를 아주 섬세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전을 내렸으니 말이다. 체계를 주장했던 철학이 아니라 치료로써의 철학을 다 둘 때 조심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쨌든 나가르주나나 비트겐슈타인 덕택에 우리는 한 가지 지혜를 배우게 된다. 철학 모르고 오용 말고, 철학 좋다고 남용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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