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나는 무척이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때마침 패스트캠퍼스에 신규 개설된 글쓰기 강의를 알게 되었다. 카드별 무이자 기간을 확인해가며 마치 대기업 회계팀처럼 철저한 이자 계산을 통해 무려 10개월간 무이자가 가능한 결제 수단을 찾아 해냈다.
수업 방식은 간단했다. 강의 영상을 보고, 글을 한 편 쓰기만 하면 된다.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는 그 글에 대한 코멘트를 강사가 해준다. 나는 코멘트를 바탕으로 성장한다. 뭐 아주 익숙한 형태다. 하지만 그 최악의 선생은 코멘트를 댓글 다는 수준으로 해주었다. 알아보니 100여 명의 수강생의 글을 한 명의 선생이 코멘트를 달아주는 구조이며, 브런치 심사 통과를 도와주는 수업이었다.
내가 무이자 계산에 정신이 팔려 너무 띄엄띄엄 본 것이다. '브런치', '출판사 편집자 출신 강사', '출판 기회로 이어질 수도' 이런 문장에 넘어간 것이다. 아... 나란 녀석... 내가 자책에 빠져있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했던 것 같다. 곧 공지글이 하나 올라왔다.
"이번 클래스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를 위한 수업입니다..."
1년에 욕을 한번 할까 말까 한데 연초부터 욕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뻔했다. 글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애초에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다. 자신의 허리와 손, 머리카락까지 갈아 넣는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하는 사람, 게다가 그 짓을 돈까지 내가며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너럴인가? 정말 초하이 스페셜리스트다.
돈이 너무 아까웠고 이걸 기회로 글이라도 꾸준히 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동안 방치해놨던 이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다. 최악의 선생님은 브런치에 연재 중인 <반지하 생활자의 수기> 3번째 에피소드 정도 봤을 때 나에게 미친 코멘트를 달았다.
"00님은 지금 머릿속이 반지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오세요."
지가 강의에서 진실된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해서 용기 내서 썼더니 격려는커녕 훈계질이라니. 내 눈이 잘못된 줄 알고 꼴랑 2-3줄 밖에 안 되는 빨간색 문장을 몇 번이나 봤다. 이게 글쓰기 수업인지 동네 아저씨랑 펜팔 하는 건지 구분이 안됐다. 차라리 진짜 펜팔을 했으면 이렇게 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당장 안티 카페를 만들어 불만 있는 수강생들을 모아 집단 소송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선생을 고른 게 나니까. 자세히 보지도 않고 고른 게 나니까. 책임을 져야지.
최악의 선생이 보여준 저런 방식은 일종의 '잘 좀 해봐' 타입이다. 나는 10여 년 정도 연기학원에서 연기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하루가 불안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잡고 사는 그들에게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잘 좀 해봐" 다. 잘 좀 해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말은 선생이 해선 안 된다. 그들이 고된 알바와 수많은 무이자 계산을 해서 결제하는 그 고사리 같은 돈을 받는 선생은 절대 그렇게 해선 안된다. 적어도 '잘'의 의미를 깊게 해석해서 쉽게 가르쳐줘야 한다. 내 최악의 선생이 했던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훈계였다.
수십 년간 글쓰기를 가르친 앤 라모트는 그녀의 책 <쓰기의 감각>에서 "잘 좀 해봐"라는 말을 이렇게 풀어낸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 쓴다. 만약 성안에 출입이 금지된 문이 하나 있다면, 당신은 악착같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살고 있는 방에서 가구들의 배치만 이리저리 옮기며 살게 될 것이다.
<쓰기의 감각> p.300
최악의 선생을 만났지만 어떻게든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뭐라 하던 신경 쓰지 않고 꿋꿋하게 글을 썼다. 어이없는 댓글은 계속 이어졌지만 가볍게 무시하며 글을 썼다. 그렇게 총 16편의 글을 완성했다. 한 주에 한 편씩. 16주를 썼다. 덕분에 게으르게 방치했던 브런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일주일에 한편씩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말로만 쓰던 글을 드디어 손을 쓴 것이다.
가끔 혼자 하는 망상인데 그 최악의 선생이 사실 천재라서 내 글을 보고 내 심리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게으른 완벽주의자에게는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해서 그런 훈계질을 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에게는 내면에서 피어나는 진실된 목소리를 용기 있게 건져내어 자유롭게 쓰라고 조언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