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은 여백의 미?! 요리의 조명 역할
맛에는 빈칸이 필요하다. 담담한 맛으로 비워두는 여백은 곧 다른 맛들을 더 잘 느끼게 하고 더욱 선명하고 오래가는 여운을 줄 수 있다. 다른 음식보다도 이를 잘 표현하기 좋은 음식이 바로 한식, 그중에서도 국과 탕인 듯싶다. 소고기 뭇국이나 서울식 육개장을 먹을 때 느껴지는 그 담백함이 바로 여백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담백하기만 한 맛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맛의 총량을 의도적으로 약간씩 낮춘 것을 말한다.
요리를 하기 시작한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조미료와 재료를 넣어 맛을 꽉 차게 만들고 싶어 진다. 상상 속의 그 맛을 내기 위해 맛의 도화지를 빈칸 없이 채우려고 한다. 그러다가 몇 번 해보면 질린다는 걸 느낀다. 그러면 하나의 음식 속에도 맛의 빈칸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이 조미료를 더 넣을까? 하다가도 멈추게 되고, 이 재료를 더 넣을까? 하다가 그만두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이렇게 재료가 안 들어가는 게 무슨 요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넣지 않아 보면 맛의 여백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경상도 출신 부모님이 해주신 육개장만 먹고 자라다가, 최근 들어 처음 심심한 육개장을 먹었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딴 판이었다. 양지에서 우러나온 국물의 은근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최근 들어 먹었던 순대국밥 이야기를 해보자. 내장의 잡맛이 싫어 맑은 탕국에 들어가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그 순대국밥은 온통 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큰 기대 없이 내장을 하나 둘 씹어갔는데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던 국밥. 그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전체적인 국밥의 맛의 조화가 칭찬할 정도였다. 어떤 맛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담담한 맛의 빈칸이 존재했다. 다 먹고 나서 셰프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주방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이걸 아시는 분이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맛의 여백은 수많은 색채 중에 존재하는 하나의 빈 공간일 뿐, 여백 자체가 전체가 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요리의 특징 중 하나인, '원하는 맛만 뽑아내고 다른 맛은 버린다'는 개념은 어쩌면 여백이 너무 커져버린 것 같기도 하다. 파스타를 만들 때도 빈 공간이 없다면 주인공들이 부각되지 않는다. 명백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치즈는 어떤 맛도 덮어버릴 수 있기에 빈 공간의 도움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망친 파스타를 살려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여겨지는 올리브유는 빈 공간의 도움을 톡톡이 받는다고 본다. 올리브유의 풍미가 빈 공간 속에서 느껴지는 것과, 여러 가지 강렬한 맛들에 묻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재료가 적게 들어가는 파스타 만들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스스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창작요리인 '쌈장 메밀면'도 맛의 여백을 살린 대표적인 예다. 재료는 쌈장, 메밀면, 참기름이 기본이며 특별할 것이 없다. 메밀면도 그냥 밀가루가 많이 섞여있는 싼 걸 쓴다. 포인트는 쌈장을 '이 정도만 넣어도 맛이 날까?' 싶게 적게 넣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맛이 나겠지 하는 정도에서 조금 덜 넣어야 한다. 그리고 참기름은 듬뿍 넣고 섞어 먹으면 그 특유의 풍미가 아주 매력적이다. 즉, 쌈장에 재료들의 맛이 묻히지 않는 것이 요점이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밀가루의 맛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편인데, 면 음식에서 밀가루의 맛과 풍미 그리고 면의 식감은 요리의 맛에 큰 요소로 작용한다. 면을 많이 먹는 중국 사람들은 면의 굵기, 식감과 풍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부분들은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다. 하지만 맛의 여백이란 개념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가? 다른 맛들이 자신을 뽐내며 놀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를 쏴주는 게 바로 맛의 여백이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음식은 감동이 오래가고 편한 마음으로 계속 찾게 된다. 쉬어가는 느낌을 주는 맛, 바로 담담한 맛이자 맛의 빈 공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