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결핍이 만들어내는 정서

- 꾸준함과 인내심을 자산이라고 보는 관점

by 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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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는 꾸준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가진 것 중 내세울 수 있는 건 무모함과 호기심이라서 잘 포장하자면 도전 정신 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타고나는 기질 그리고 양육자와의 애착과 양육환경으로 인해 형성되는 성격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에 좋은 단서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참는 걸 잘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걸 잘 하지 못하고,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탐닉하는 그런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나의 부모님이 나를 정성으로, 사랑으로 키워주셨고 풍부한 경험과 다정함으로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주셨기에 나의 성격은 관계지향적이며 다정한 성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심리상담 장면에서 내담자의 기질과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두루 쓰이는 심리검사 종류 중에 TCI 검사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MBTI나 임상장면에서 정신병리를 다각도로 알아보기 위한 MMPI검사처럼 자기보고식 검사이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기질과 성향을 리커트 척도로 표시하면 결과치가 나오는 객관형 심리검사이다.


다시 기질과 성향을 TCI 검사의 요소로 이해하자면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을 들 수 있는데. 몇 년 전 나의 검사 결과를 기억에 의존해서 끌어올 것도 없이 나는 자극추구는 높고, 위험회피는 낮으며 사회적 민감성은 중간이고 인내력은 낮은 편이다. TCI에서 말하는 기질은 외부 자극에 대해 내가 자동적으로 일으키는 정서적 반응이기 때문에 꾸며내거나 환경에 의해 조작되거나 잘 변질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TCI 기질 .jpg


성격은 다시 자율성, 연대감, 자기초월의 요소로 세분화되는데 성격적으로 나의 자율성은 높고 연대감은 낮은 편이며 자기초월은 높은 편이다. TCI에서 성격은 의식적 측면을 강조하여 외부의 자극과 환경으로 인해 추구하게 된 목표나 가치가 개인차를 나타낸다는 관점으로 설명된다.

TCI 성격.jpg


TCI는 자기보고식 검사이면서 객관적인 수치가 나오지만 타 심리검사와 마찬가지로 결과치는 한 개인을 이해하는데 참고로 해야할 뿐, 검사 결과로 사람을 규정짓거나 판단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된다. 우주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의 개인이 숫자로, 혈액형 1/4의 구분으로, MBTI의 16가지 중 하나의 유형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맞든 안 맞든, 나와 비슷하거나 닮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는 여정에서 단지 나 자신만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내가 심리상담, 미술치료를 전문분야로 삼고, 직업적 정체성을 이 분야에서 찾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가 기본과 과정, 그리고 전부가 되어야 하는 현재 직군으로 이직한지 17개월 차가 되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한 기간으로 봐서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수습 기간은 이미 넘었지만 신임 딱지는 여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만년 초보이다. 행정, 교무, 학사, 생전 내가 일하게 될 분야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고, 상황의 전개 상 자연스럽고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국립대학교의 교직원 포지션.

교수, 강사, 학생의 행정적 처리를 관리하고 도움을 주고, 안내를 하고, 수합을 하고 다시 처리하는 이 모든 과정이 행정적 절차에 따라야 하는 무미건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성이라던가, 자기 의견이라던가, 호기심이라던가, 융통성이라던가, 대충대충이라던가 하는 여유를 빙자한 시간적, 정서적 구멍이 뚫린 형태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꼼꼼해야 하고, 상명하복 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꾸준해야 하고,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하고, 다시 또 꼼꼼해야 하는.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실수가 어느 틈에선가 스물스물 독가스처럼 삐져 나오는 지릴멸렬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꾸준함과 인내심이 크게 결핍이 되어왔다. 어쩌다, 공무원처럼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 결혼과 이혼 후 프리랜서로만 살아왔던 신분에서 4대 보험 수령하는 교육직 공무원으로 정규직이 되어 일하고 있지만. 어쩐지 나는 늘 불편하다. 그래서 점심은 늘 소화를 다 못 시키는 편이고, 사회적 페르소나로 나타나는 행정적 미소와 딱딱함처럼 보일 수 있는 단호함을 갑옷으로 입고 주 5일, nine to six 로 꼬박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 직군에 유달리 매료되지 않았던 것은, 혹은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은 나의 들끓는 호기심과 하루에도 몇 번 씩 우주 창공을 찌르는 창의성이 존중받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때문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창의성이나 호기심을 굳이 발휘할 필요도 없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해야하는 것을, 제때 제때 꾸준하고 일관적으로 하면 될 뿐이다.

제대로 들여다 본 적도, 직접 써 본 적도 없는 대내외적 공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쓰고 하면서 낮아가는 자존감과 채워지지 않는 자기효능감 때문에 괴로운 시간이 많았다. 오히려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나를 온종일 지배하거나 무기력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간에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가는 경험을 자주 했다.


하지만 나는 결론적으로는 나의 커다란 결핍을 깨닫게 해준 이 일에 감사한다.

그동안 부족하고 빠져 있었던 나의 결핍이 나의 결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결점은 곧 나의 치부가 되어 나를 괴롭힐 수 있는 다분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에게 부족한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 그리고 위험회피 요소.

이 직군은 차분하고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에게 어쩌면 더 잘 맞을 지 몰라도 자극추구가 높고 위험회피가 낮다고 해서 나같은 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직군은 또 아니라는 관점이 생겼다.


나의 결핍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내가 추구하는 것은 제자리 걸음 혹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장의 기폭제로 여기며 나를 꾸준히 연마해나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 일을 하기까지 정해 놓은 시점이 24개월이기는 한데, 어떤 상황적 변수가 생길 수 없어서 초연해지려고 한다. 변화에 적응이 빠르고 자극을 추구하는 나의 태생적 기질에 변화라면 변화가 생겼다.

바로 어떤 일이든 인내를 가지고 꾸준하게, 그리고 태연하되 꼼꼼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하루 중에 뱉어내는 나의 말투와 어법도, 걸음걸이도, 음식을 먹는 속도도, 집을 정돈하는 패턴도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를 해가고 있다.


이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결핍은 결국 나의 부족함을 수용하게 하여 성장하게 만드는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난 17개월의 시간 동안. 정체되지 않고 부던히 변화해온 내 자신과 그리고 나의 환경적 요소에 감사를 보낸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