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침실 한 귀퉁이에 놓인 작은 선반 위의 풍경이 오늘 따라 내 눈을 사로잡는다,
잠이 들기 전에 이 공간에 눈을 살포시 두기만 해도 마음의 피로가 풀리게 되고 위로받는다.
오늘은 더더욱 다정한 말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되는 밤.
오늘 아침 집청소를 하던 중 미루고 미룬 집안 구석의 가방 하나를 건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도록 일부러 손 대지 않았던 가방,
오래도록 지친 마음 대신 사랑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던
나를 지나치게 쉽게 좋아하고 지나치게 쉽게 철회해버리고 도망간
지난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던 물건.
그 사람이 한때는 다정하게 했던 말들에는 꽃이 피어나기도, 희망 같은 게
어슴프레 솟아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지켜지지 않은 그 말들은 결국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한때는 다정하고 달콤했던 말들이 지나고 나면 개소리로 치부되버린 것은 어떤 논리적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의 청자로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해석하는 패러다임이 바뀌어진 것 말고는 실제 그 말은 상황에 따라 온도를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을 잃은 말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입력되는 말은 나의 심리정서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개소리가 만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초연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생명을 잃은 말을 개소리라고 정의내리고 나니 한결 더 그 사람의 말들이 가볍고도 우습게 느껴진다. 그 당시에는 물론 파닥거리는 감정이라는 진한 위스키를 들이키고 마구 내뱉지 않으면 안될만큼 격해졌었겠지. 만난 시간과 비례하지 않게 급한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그 개소리의 교훈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개소리에 대해 조금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는 '자기만의 방'에 오롯이 나를 가두고 사색의 흔적을 활자로 남겨본다.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방도 물론 정돈되고 돌보아야 하겠고, 나의 사유와 사색의 공간으로서의 비실체적인 방도 정돈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오래 해오고 있다. 한 사람의 정신 그리고 공간은 놀랄만큼 닮아 있어서 어지럽고 복잡한 심리 상태를 가진 사람의 방이 깔끔하거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도 극한의 스트레스나 우울감을 겪을 때의 방 상태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자주 돌아보고 정돈하려고 애쓰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간극을 인정하면서도 저열하거나 나약한 존재로 분류해버리는 남성 우월적 사고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을 보면서 불쾌함보다도 아, 이 역시 '개소리'일 수 밖에 없다고 치워버린다. 교육받는 여성의 잠재력을 무의식 중에 두려워했을 나폴레옹도 그래서 여성은 교육을 받아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이분법적 사고로 여자는 신성하거나 저급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평등하고 함께 성장하고 공존해야 할 대상이라 여겨달라는 주장 역시 여성을 남성과 대등하게 보는 시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겠지. 이분화된 성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한 사람, 오로지 개별적 존재로서 존중받고 이해받고 싶다.
나에게 '진정한 장소'란 내가 의심없이 숨어들 수 있고 세상의 시선으로 검열받지 않을 수 있는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 그게 대부분은 나의 침대 위. 책 몇 권과 여러 전자기기 (폰, 패드, 노트북), 저녁 루틴으로 바르는 화장품 정도만 있는 나의 작은 방. 요즘은 안방의 퀸침대는 손님용으로 아예 내어주고 누워보지 않은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개소리를 싸지르고 간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이 작고 고요한 공간을 오래 오래 나의 정신적 쾌락으로 삼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는 나의 글을 꼼꼼히 뜯어보기도 할테고 누군가는 나의 글이 여러 번 읽어도 읽혀지지 않는다며 훈수를 두기도 할테지. 그러거나 말거나. 누군가에게는 읽을만한 글, 누군가에게는 개소리가 될테니 그러거나 말거나. 의 자세를 취할 수 밖에. 나는 꾸준히 내 식대로 글을 써왔고 그렇게 해나갈 것이다. 내가 하는 개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썩 괜찮은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설픈 상상이나 보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