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공공과 민간, 같은 단어의 동상이몽

우리는 분명 같은 PPT를 보고 있다

by 아이린

기획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공공을 상대하는(B2G)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을 거다.

"이번 사업은 성과 기준을 어떻게 잡으실 건가요?"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하게 가보시죠."
"그래도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그 자리에서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회의도 별 문제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좋습니다, 그 방향으로 정리하죠." 같은 말이 나오면, 일단은 잘 된 것 같다.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다.


공공 쪽 담당자는 과장님 자리로 돌아가 이렇게 보고한다.

"기업 쪽도 공공성·안전 기준엔 동의했고요, 다만 홍보 효과는 조금 더 보완해 주기로 했습니다."


민간 쪽 담당자는 팀 메신저에 이렇게 쓴다.

"공공 쪽에서 리스크 줄이는 조건으로 승인해줬고요, 대신 노출과 브랜드 스토리는 우리가 더 챙기기로 했습니다."


똑같은 회의, 같은 PPT, 같은 대화였다.

그런데 각자 자리로 돌아가 정리하는 순간부터 문장과 요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언어의 간극은 대체로 이때 드러난다.

회의실에서는 “네, 네” 하며 지나갔던 말들이,

각자 자기 조직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갑자기 또렷해진다.


이런 번역기 있으면 좋겠다.


공공과 민간이 함께 일할 때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꼭 이해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전에,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언어로 옮겨 담는 과정에서 이미 어긋나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분명 같은 PPT, 같은 기획안을 보고 있었는데도 공공어와 민간어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지에 대하여.




성과: 숫자는 비슷한데, '잘했다'의 정의가 다르다


공공 쪽에서 "성과"를 꺼내면 보통 질문이 이렇게 날아온다.

정책 목표에 부합하는가

민원이 줄었는가

취약계층·소외지역 참여가 늘었는가

시민 만족도는 어떤가

여기서 성과는 결국 '얼마나 많은 시민에게, 얼마나 공정하게 혜택이 갔는가'와 연결된다.

세금을 쓰는 조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익·형평성·절차가 중심에 선다.


반대로 민간이 떠올리는 “성과”는 좀 다르다.

매출, 이익, 객단가

신규 고객 수, 리드 수

전환율, 재구매율, 브랜드 인지도

여기서는 훨씬 직선적이다.

'돈을 벌었나, 성장했나.'

회사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결국 숫자로 답해야 하니까.


그래서 같은 회의실에서도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민간 : "올해 캠페인에서 총 노출 수는 ○○만 회, 현장 참여자 수는 3,200명 정도였고요. 브랜드 호감도와 재참여 의향도 전년 대비 상승해서 전반적으로 성과가 좋았습니다."

공공 : "네, 숫자는 좋은데요… 민원은 좀 줄었나요? 취약계층이나 소외지역 참여는 어느 정도였죠? 정책 목표랑 연결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둘 다 틀린 말이 아니다.

똑같은 결과를 두고,

한쪽은 '브랜드 성과'로, 다른 한쪽은 '정책 성과'로,

그냥 '성과'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좌표에 꽂아 쓰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각자가 자기 좌표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실에서는 "성과가 중요하다"는 말에 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작 각자의 사무실에 돌아가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공: "기업은 왜 맨날 돈 얘기만 하지?"

민간: "공공은 왜 이렇게 측정하기 어려운 성과만 요구하지?"


같은 PPT, 같은 지표, 다른 결론.
이쯤 되면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거창한 성과랄게 있나요.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 그거면 됐죠!




책임: 공공은 '절차'를, 민간은 '계약'을 떠올린다


'책임'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공공과 민간의 머릿속 자막이 다르게 뜬다.


공공에서 책임은 보통 이런 질문으로 번역된다.

감사가 떴을 때, 서류로 설명이 가능한가

의회·언론·민원 앞에서 논리가 서는가

내부 규정·지침·절차를 어기지 않았는가

여기서 책임은 '절차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와 붙어 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규정된 절차에 따라, 할 만큼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반대로 민간에서 책임은 더 직선적이다.

계약서에 뭐라고 적혀 있는가

손해가 나면 누가 어디까지 부담하는가

법적 리스크와 클레임은 누구 앞으로 날아오는가

여기서 책임은 곧 '리스크를 누가, 얼마까지 들고 갈 것인가'다.


그래서 합동 회의에서 이런 대화가 평행선을 그린다.

공공: "만약 사고가 나면 저희 쪽이 행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해서, 안전 관련 절차를 더 밟아야 합니다."

민간: "절차는 괜찮은데요,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 쪽이 감수하는 리스크에 대한 리턴이 어떻게 되는지 정리가 필요합니다."


공공은 '나중에 감사·감사·감사…'를 걱정하고,
민간은 '이렇게 절차가 추가되면 비용이 괜찮은가…'를 따져본다.


둘 다 책임을 말하지만, 한쪽은 행정의 언어, 다른 쪽은 손익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같은 단어로 다른 회의를 하는 셈이다.




리스크: 공공은 ‘사고와 여론’을, 민간은 ‘투자와 브랜드’를 본다


회의에서 자주 마주치는 조합이 있다.

"무엇보다도 리스크 관리가 우선입니다."

맞는 말인데, '리스크'이라는 단어 뒤에 붙어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서로 다르다.


이놈의 리스크!


공공에서 '리스크'는 대체로 이렇게 정의된다.

안전사고, 특히 인명 피해

정치적 논란, 여론 악화

세금낭비 프레임, 부정 기사

리스크의 1순위는 사고·정치·여론이다.
사람 다치지 말 것, 기사 나지 말 것, 감사 받지 말 것.
이 세 가지가 머릿속 삼각형을 이룬다.


민간에서 '리스크'는 조금 다른 화면이 뜬다.

이만큼 투자했는데 회수가 안 되면 어떡하지?

브랜드 이미지가 손상되면 장기적으로 타격이 크지 않을까?

이 이슈가 잘못 번지면 불매·보이콧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여기서 리스크는 재무·브랜드·법적 리스크에 가깝다.


그래서 공공은 "사고만 안 나면 된다"를 1차 기준으로 세우고,

민간은 "이 정도 리스크면 이 정도 기회는 있어야 한다"를 본다.

둘 다 "위험을 줄이자"고 말하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그래프를 머릿속에 띄우고 있다.

한쪽은 '책잡히지 않을 일을 0에 가깝게 만드는 쪽'을, 다른 쪽은 '대외적인 이미지와 손익분기점을 넘어가지 못하는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들이 함께 보는 PPT에는 단 한 줄만 적혀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과감한 시도를 통해 유사 사업과 차별화를 둔다."

문장은 예쁘지만, 현실에서는 이 문장을 두고 두 서로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하다.




파트너십: 로고를 보는 쪽과, 서사를 보는 쪽


"파트너십"이라는 단어도 꽤 오해가 많은 단어다.


공공에서 파트너십은 주로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

공동 주최/주관/후원 표기

로고 크기와 위치

보도자료·현수막·온라인 홍보물에 들어가는 공식 명칭

여기서 핵심은 '어디에, 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들어가는가'다.


반대로 민간에서 파트너십은 조금 더 서사 중심이다.

우리 브랜드가 이 프로젝트와 왜 함께해야 하는가

고객 입장에서 봤을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가

1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가져갈 포맷이 될 수 있는가

만약 1회성 이벤트라면, 우리 프로젝트를 각인시킬 만큼 화제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파트너십은 "같이 돈 보탰다"가 아니라, "같이 이야기를 만든다"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공공: "이 정도면 로고 충분히 노출해드린 거 아닌가요?"

민간: "로고 문제는 아니고요… 이 안에서는 우리 브랜드가 왜 여기 있는지가 잘 안 보여요."


둘 다 '파트너십'을 말하지만, 한쪽은 표기 방식을, 다른 쪽은 공동 서사를 떠올린다.

같은 PPT 한 장을 두고, 누군가는 로고 위치에 만족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건 그냥 형식적인 스폰서 명단이잖아'라고 느낀다.




그래서, '통역사'가 필요하다


B2G 기획자는 결국 '통역'을 하게 된다.

서로가 진짜로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 요구를 각자의 조직 안에서 실행 가능한 언어와 구조로 바꾸고,

반대로 우리 조직이 떠안게 될 손해·리스크·제약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는,

이 셋을 동시에 해야 한다.



먼저, 공공의 문장을 우리 조직의 실행 언어로 바꾸는 일부터.


예를 들어 공공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정책 목표에 맞게 공익성과 형평성을 담아주시고요, 민원 소지와 안전 리스크는 최소화해주셔야 합니다."


이 문장은 내부에서 이렇게 번역돼야 한다.

"이번 건은 ‘정책 성과’로 남길 문장이 핵심이라 타깃·메시지부터 공공 보고서에 들어갈 형태로 잡아야 해요.
그리고 민원·안전 이슈 터지면 우리 쪽이 손해가 커지니까, 동선,안전관리,현장 인력은 초반 기획과 견적에서 필수 항목으로 넣어야 합니다. 빠지면 일정도 품질도 못 잡아요."

이게 정확히 전달되어야, 내부 디자이너·실무자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움직여 준다.


반대 방향의 통역도 중요하다.

민간 내부 회의에서 나오는 문장은 보통 이렇게 생겼다.

"이 단가에 이 리스크면 우리 쪽 손해가 너무 크다."
"이 일정이면, 솔직히 안 하는 게 낫다."


이 문장을 그대로 공공에 들이밀면, 공공은 아래처럼 받아들인다.

"협조 의지가 낮다."
"공공사업 구조를 이해 못 한다."
"돈 얘기만 한다."

그래서 역시 민간의 입장을 공공의 언어 구조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이 단가에 이 리스크면 우리 쪽 손해가 너무 크다.'
→ '현행 단가·업무 분장 체계로는 안전·민원 등 현장 리스크 발생 시 수행기관 부담이 과중될 우려가 있어, 사업의 안정적 추진 및 수행 품질 확보에 제약이 예상됩니다. 현장 대응 책임 범위를 재정립하고, 추가 인력·운영비 반영을 전제로 역할 조정 및 단가(계약금액) 재산정이 필요합니다.'


핵심은 단순하다.

"우리 손해예요"가 아니라, 공공이 책임져야 할 리스크와 사업 품질의 언어로 말하는 것.

그제야 공공도 '이건 우리도 구조를 다시 봐야겠구나'라고 인식할 여지가 생긴다.


좋은 통역은 예쁜 말만 잘하는게 아니라, 양쪽이 무리해서 부러지지 않도록 '구조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주는 것이다.

B2G 기획자는 공공과 민간 사이에서 '이 정도면 서로 감당 가능한 조건'이라는 현실적인 접점을 찾아내야 한다.




같은 PPT, 다른 언어. 그 사이에 서 있는 우리들


회의가 끝난 뒤,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아마 그날 회의실 안에서는 공공어와 민간어가 서로 엇갈리며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조용히, 그 말들의 간극을 메우고 있었을 거고.


다음 회의에서 누군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하게 차별화 시켜서 진행해보시죠."

그때 속으로만 이렇게 한 번 웃어보자.

"좋습니다. 그 ‘과감하게’가 어느 쪽 언어의 과감함인지부터 오늘 회의 안에서 같이 정해보시죠."


꼬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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