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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 9년 차에 접어들며

나 혼자 하숙한다_첫 번째 이야기

by 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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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자기소개서입니다. 제가 하숙을 시작한 건 군 제대 직후인 2009년 2월이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절 받아주지 않더라고요. 군대 가기 전까지는 기숙사에 잘 살았거든요? 생각을 해보니 제가 군대 가기 전에 기숙사에서 망나니짓을 조금 했던 게 아마도 기록에 남았었나 봅니다.


아버지에게 미안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선 기쁜 마음이 적잖았습니다. 혼자 지낼 수 있는 방이 생긴다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저는 어릴 때부터 내 방이 없었어요. 아참, 오해는 마세요.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단칸방에 일가족이 살았다거나 하는 90년대 초중반 일일드라마 이야기는 아니니깐요. 그냥 집 구조가 좀 그랬어요. 누나 두 명은 같은 방을 썼는데, 제 방을 따로 만들어 줄 공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할아버지 내외가 쓰시던 큰 방을 아버지와 같이 썼어요. 할머니는 친할머니가 아니라 새할머니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자기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장롱에 있던 값비싼 폐물과 이것저것 돈 되는 것들을 다 챙겨서요. 새할머니는 그것도 모자라 유산을 두고 법정 공방전까지 벌였죠. 완전히 정리되기까지 한 10년은 걸렸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우리집 일이었네요. 아버지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한 둘씩 보이기 시작한 게 아마도 이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하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 반도 모두 4인 1실 기숙사에서 살았거든요. 군대 2년 3개월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저는 기숙사 생활이 싫어서 혼자 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성격이 그리 예민하지 않아서일수도 있고, 여럿이 같이 사는 것에 이미 익숙해 있다 보니 아무렇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하숙을 하게 되면서 기쁘고 설렜던 이유는 아무래도 '처음'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다가와서였던 것 같습니다. 내 방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기능적인 면에서 기대됐다기 보단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좋았던 것이겠지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새 학기 시작 전날, 하숙집에서의 첫날밤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다른 건 잘 모르겠고 확실히 잠은 잘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년이 넘는 공백기를 거쳐 다시 학생이 된다는 것과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잠든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새로움'이 뒤섞여 일종의 화학작용을 일으켰던 것은 아닐지.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운 현재의 내 삶과 비교해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로, 누가 봐도 '신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때가 묻고 이곳저곳 실밥도 터진, 중고나라에 판다고 올려놓기도 애매한 그런 '하품'이 됐지만 말이죠.


참, 왜 하필 자취가 아닌 하숙이냐고 궁금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처음에 살 곳을 구할 때에는 자취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으레 당연히 밥을 차려주는 하숙집에 가야겠다 생각했죠. 또 밥도 밥이었지만, 당시에 내 자취방에 보증금이나 전세금을 박아놓을 만큼의 목돈이 집에 없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만약 그때 집에 여유가 있었다면, 하숙이 아니라 지금도 자취를 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고요.


하숙이나 자취나 혼자 자기 방에 산다는 건 크게 다르지 않긴 한데요. 하숙 9년 차로서 말씀드리자면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화장실을 같이 쓴다거나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하는 부분은 기능적인 면에서의 차이일 뿐이고, 진정한 차이는 사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있습니다. 하숙집에서 내 옆 방에 사는 사람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지만, 자취방 옆에 사는 사람은 다른 집에 사는 사람이지 나랑 같이 사는 건 아닙니다. 하숙집에 사는 사람은 어쨌든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느낌을 안고 살 수밖에 없죠.


바로 이 점,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자취를 했다고 하면, 물론 비슷한 이야기들을 할 순 있겠지만 소재가 금방 바닥이 나겠지요. 또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들을 한 번쯤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난 9월 취직을 하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사회생활 5개월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이런 생활이 낯설고 내 일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죠. 아무래도 지나온 세월을 정리하는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몇 편의 글을 써야 할지는 지금으로썬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만, 어질러진 방을 천천히,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나가려고 합니다. 언제쯤 글이 완결될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날이 오면 나라는 존재가 적어도 한 단계 정도는 성숙해져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뭐,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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