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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Feb 26. 2023

삶이 망가지는 신호는 늘 음식에서 왔다

나는 나를 먹여 살리는 일에 충실하고 있는가?

음식을 할 줄 몰라도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세상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방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에는 나름의 제한이라는 게 있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면 계란이나 라면을 활용한, 배고픔을 겨우 달래주는 초보적인 음식이 전부였고, 배달을 시켜 먹는다고 해도 패스트푸드나 평준화된 한식 정도에서 스스로 타협을 봐야만 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덮고 난 뒤에는 배달 시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늑한 침대에 누워 손가락을 몇 번만 움직이면 햄버거, 피자와 같은 패스트푸드는 물론이고 백화점에 입점한 유명 셰프의 음식까지 편하게 받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1인 가구를 위한 밀키트 제품도 이젠 차고 넘친다. 타협이 아닌 선택의 시장이 열렸다.


음식은 만드는 게 아니라 주문하는 것


배달 음식의 종류에는 더 이상 제한이라는 게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24시간 운영을 하는 배달 전문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음식을 분주히 나르는 오토바이도 밤을 잊은 채 도로를 달린다.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내가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언제든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는 것보단 주문해 먹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개인의 삶을 봐도 그러하다. 특히나 1인 가구의 경우 외식을 하거나 포장, 배달을 통해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경이 되었다. 사회와 시대가 변화하면서 인간의 의/식/주 모습이 바뀌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 '식(食)'의 모습이 바뀌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은 건 왜일까?


삶이 망가지는 신호는 늘 음식에서 왔다


집에서 직접 밥을 해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때마다 삶은 자주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분명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전보다 버는 돈이 많아지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별다른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는데 왜 자꾸만 우울감이 찾아오는 걸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바라던 것을 얻었는데 왜 점점 삶은 공허해지는 걸까?



이러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온통 헤짚어 놓으면 하루는 금세 진창으로 떨어졌다.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빨래와 설거지 거리는 쌓여가고, 내가 우울감에 허덕이는 만큼 집도 엉망이 되었다. 지금의 우울감에서 얼른 벗어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자꾸만 몸은 편함을 찾았다.


'피곤하니 빨리 밥을 먹고 나머지 일을 해야지'하고 배달 음식을 주문해 놓고, 밥을 먹고 계획한 일을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편리함과 안락함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삶은 내가 바라는 모습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러면 또 돈으로 시간을 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의 원흉은 음식이었다. 내가 만들지 못할 음식, 내가 만들어서는 흉내 내지 못할 다양한 맛을 지닌 음식들이 내 삶을 망치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다. 음식의 잘못이 아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된 건 내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 하나뿐이었다.


배고픔을 달래는 것
우울한 하루에 대한 복수심을 채워주는 것


내가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복수심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 고생을 해서 돈을 버는데 내가 원하는 음식이라도 먹어야지.',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밥 정도는 편하게 먹어도 되잖아'하는 마음이 화를 불러왔다. 나는 내 노동에 대한 보상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복수의 화살이 제 자신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번거로움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퇴근 후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만반의 준비를 한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나는 집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큰 의욕이 없다. 해야 하는 일들 대신하지 않을 일들의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한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일은 그 리스트에서 빠지는 일이 참 드물었다.


음식은 먹는 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귀찮은 작업이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한다고 하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찌어찌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한 뒤에도 문제였다. 이미 요리를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썼는데 저걸 다 언제 치우지 하는 생각에 속이 울렁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이상하게 요리를 직접 해서 끼니를 챙기는 날에는 정체 모를 힘이 솟았다. 배달 음식을 먹은 뒤에는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는데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설거지를 하고 정리를 하는 것까지 모든 게 순식간에 끝이 나곤 했다. 밥을 먹고 치우는 데 시간은 배가 걸리는 데, 어째서 더 힘이 나는 걸까?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작고 사소한 변화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밥을 잘 챙겨 먹으면 먹을수록 정신이 맑아졌고, 공간이 함께 깨끗해졌다. 사람이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스스로 음식을 직접 차려 먹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 위력을 날로 깨닫는 하루였다.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가?


삶이 다시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가장 먼저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를 살펴본다. 불길한 느낌이 들 때는 매번 식사에 공을 들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날들이 이어진 후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살 수 있다 착각하며 보냈던 날들의 반격이 시작되면 귀찮음으로 절여진 몸을 이끌고 장을 보러 나간다. 나를 먹여 살리는 일에 충실해야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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