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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유

개발자도 책을 읽어야 한다.

by jeromeNa

내성적인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말을 먼저 거는 편이 아니다. 모임에서도 조용히 듣는 쪽이다. 개발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코드를 짜는 일이니 유리한 성격이라고들 한다.


현장은 달랐다. 개발자도 말을 해야 했다. 고객과 회의를 했다. 기획자에게 기술적 한계를 설명해야 했다. 팀원들과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말을 잘 못하면 오해가 생기고, 잘못된 개발로 이어졌다. 잘못된 개발은 야근으로 돌아왔다.


듣는 건 잘한다고 생각했다. 내성적이니까 말하기보다 듣기가 편했다. 그런데 듣기만 해서는 안 됐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해야 했다. 요점을 파악하고, 핵심을 정리해야 했다.


회의에서 고객이 30분간 설명했다.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회의가 끝나고 팀원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 거야?" 팀원도 고개를 갸웃했다. 30분간 들었는데 핵심을 모르겠다고 했다. 그날 밤 회의 내용을 정리하느라 몇 시간을 썼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개발 서적만 읽었다. Java 문법 책, 알고리즘 책, 디자인 패턴 책. 기술 서적은 정보를 얻는 데는 좋았지만, 이해력이나 정리력이 늘지는 않았다.


소설을 집어 들었다.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인물 관계를 파악했다. 복선을 찾았다.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를 생각했다. 다 읽고 나면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 소설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담겨 있었다. 같은 경험을 했어도 표현 방식이 달랐다. 어떤 작가는 직설적이었고, 어떤 작가는 비유를 썼다. 표현 방식에 따라 전달력이 달랐다. 내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상대방이 이해할지 고민하게 됐다.


인문학 책을 읽었다. 역사, 심리, 사회.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고객이 왜 저런 요구를 하는지, 팀원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사람을 이해하면 소통이 쉬워졌다.


철학 책도 읽었다. 어려웠다. 한 문장을 이해하려고 몇 번을 다시 읽었다. 그래도 읽었다. 복잡한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집중력이 늘었다. 단어, 단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겼다. 긴 문장을 끝까지 읽는 인내심이 생겼다. 고객의 장황한 설명도 끝까지 들을 수 있게 됐다. - 철학책은 인내심 기르기에는 좋은 것 같다. -


과학 책도 읽었다. 복잡한 현상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어려운 개념을 일반인에게 풀어내는 방식을 봤다. 기술적인 내용을 비전공자인 고객에게 설명할 때 참고가 됐다.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소설, 에세이, 인문학, 철학, 과학. 눈에 띄는 대로 읽었다. 베스트셀러도 읽고, 고전도 읽었다. 두꺼운 책도, 얇은 책도 읽었다.




책을 읽을수록 변화가 생겼다. 회의에서 고객이 30분간 이야기해도 핵심이 보였다. "결국 이걸 원하시는 거죠?"라고 정리하면 고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황한 설명 속에서 요점을 뽑아내는 능력이 생겼다.


정리하는 기술도 늘었다. 회의 중에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키워드만 적었다. 회의가 끝나면 키워드를 보고 내용을 재구성했다. 메일로 정리해서 보냈다. "오늘 회의 내용 정리입니다." 고객도 팀원도 좋아했다. 기록이 남으니 나중에 "그때 그렇게 말 안 했다"는 분쟁이 줄었다.


대화의 질도 달라졌다. 예전엔 기술 용어만 썼다. "API 연동하면 됩니다." 고객은 못 알아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비유를 쓰는 법을 배웠다. "택배 회사에 물건을 맡기는 것처럼, 데이터를 다른 시스템에 전달하는 겁니다." 고객이 이해했다.


상대방 말에 집중하는 습관도 생겼다. 예전엔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내가 뭘 말할지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달라졌다. 소설 속 인물의 대사를 읽을 때 그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실제 대화에서도 상대방 입장에서 듣게 됐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섣부른 판단도 줄었다. 소설을 읽으면 악역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배경을 알면 이해가 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왜 저런 요구를 할까" 생각하게 됐다. 이유를 알면 대응 방법도 달라졌다.


앞서 언급했던 체험관 인터렉티브 개발을 할 때 일처럼 상대방이 설명한 것과 내가 이해한 것이 달랐다. 결과물을 보여줬더니 "이게 아닌데"라는 말이 돌아왔다. 처음부터 다시 개발해야 했다. 그 이후로 재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상대방 말을 내 언어로 다시 정리해서 확인했다.


이 습관도 책에서 왔다. 책을 읽고 나면 내용을 내 언어로 정리했다. 저자가 한 말을 그대로 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이해는 상대방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언어로 해석해서 상대방을 아는 것이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 말을 내 언어로 바꿔서 확인한다. 그래야 오해가 없다. - 쉽게 이야기해서 나라마다 문화와 언어는 다르다. 그 나라 언어 그대로 직역하면 이해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그 나라의 문화를 자기 나라의 문화에 맞게 번역을 해야 이해가 쉽다. -




지금도 책을 읽는다. 출퇴근 시간에 읽고, 자기 전에 읽는다. 한 달에 두세 권 정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꾸준히 읽는다.


실용 개발 서적은 오히려 잘 안 읽는다. 기술은 검색이 더 빠르다. Stack Overflow에서 코드를 찾는 게 효율적이고, AI를 통해 정리하고 피드백을 받는 게 빠르다. 책으로 배우기엔 기술 변화가 너무 빠르다. 작년에 나온 책이 올해는 맞지 않는다. 실용 개발서보다는 개념서 위주로 읽는다.


그래서 비개발 서적을 읽는다. 소설, 에세이, 인문학. 이런 책들은 시간이 지나도 유효하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 이건 기술처럼 바뀌지 않는다.


개발자는 코드만 잘 짜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격증만 따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 니. 다. 팀원과 소통해야 하고, 고객에게 설명해야 하고, 회의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언어 능력이다. 코딩 언어가 아닌, 사람의 언어다.


책을 읽으면 그 능력이 는다. 바로 체감되지는 않는다. 한, 두 권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1년, 2년 꾸준히 읽으면 달라진다. 회의에서 핵심을 빨리 파악하고, 복잡한 내용을 쉽게 설명하고, 상대방 말을 정확히 이해한다.


코드는 검색하면 된다. 기술은 프로젝트하면서 배운다. 그런데 이해력과 표현력은 검색으로 늘지 않고, 프로젝트한다고 저절로 늘지 않는다.


책을 읽어야 는다.


그래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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