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는 흐름이다.
설날에 본가에 들렀다가, 내 옛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일기장, 중학교 수학 시험지, 수련회에서 찍은 단체 사진. 서랍 하나를 열 때마다 시간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것까지 왜 갖고 계세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그걸 왜 버려."
시험지를 한 장 집어 들었다. 틀린 문제 옆에 빨간 펜으로 고쳐 쓴 흔적이 있었다. 그 아래 선생님이 적어준 짧은 코멘트.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거기 있었다. 내가 무엇을 어려워했고, 무엇을 열심히 했고, 어떤 아이였는지. 데이터로 보면 나는 그저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었지만, 그 낡은 종이들 속에는 한 아이가 자라온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그림을 버리지 못한다. 삐죽삐죽 크레파스로 그린 가족 그림, 스티커를 잔뜩 붙인 편지, 처음 이름을 쓴 종이. 쌓이는 줄 알면서도 정리할 때마다 손이 멈춘다. 이걸 버리면, 이 아이가 이만큼이었던 순간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서.
나의 이력서를 쓴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몇 년생, 개발자, 경력. 데이터로는 그렇다. 하지만 어머니의 서랍장 속에 있던 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자라온 시간, 서툴렀던 순간들, 조금씩 달라져 간 흔적. 그것을 나는 서사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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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이력이 아니다.
이력은 사실의 나열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서 학교를 다녔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몇 년도에 무엇을 했는지. 시간순으로 정리된 항목들. 이력서에 적히는 것들이다.
서사는 다르다. 서사는 그 사실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왜 그 학교를 선택했는지, 그 직업을 갖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그 시기에 무엇을 느꼈는지. 사실과 사실 사이를 잇는 선, 그 선 위에 새겨진 의미.
같은 이력을 가진 두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같은 학교, 같은 직장, 비슷한 경력. 하지만 그들의 서사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그 길을 원해서 걸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걸었을 수 있다. 한 사람에게 그 시간은 성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생존이었을 수 있다.
이력은 '무엇을 했는가'를 말한다. 서사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한다.
서사를 '시간의 결'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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