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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강 Oct 10. 2019

자카르타 일기

2019년 10월 5일 (토) 자카르타 맑음 36도


주말이라고 늦잠을 자려했지만 또다시 새벽에 눈이 떠졌다. 어느새 커튼 틈새로 연하게 들어오는 새벽빛, 동네 근처 모스크에서 우렁찬 기도를 준비하는 확성기의 지지 지직거리는 잡음이 잠 깬 방으로 스르륵 들어온다.


지난 몇 달간 마음속에 커지는 우울감이라는 검은 개가 눈을 뜨자마자 달려든다.

약을 먹으면 검은 개는 아주 작아지거나 희미해져서 마음 한결 가벼우나 덩달아 내 의식조차 몽롱해지기 일쑤여서 침대 옆에 약병은 열어 본 지 오래이다. 이럴 때는 몇 달간 내부수리 중이라는 간판 내걸고 마음 다독이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 어느덧 굳은살이 조금씩 잡혀가고 있다. 주말이어서 기분은 조금 더 나아지고 있다.


간단히 아침 식사 후 밀렸던 빨래와 청소를 마치고 오후에 햇볕 가득한 카페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해바라기 하였다. "백 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저)" 올해 100세이신 한국의 1호 철학가라는 김형석 교수님의 책을 읽었다. 마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에서 터득한 경험을 차분한 언조로 이야기해주시는 듯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아져가고 있는 요즈음 참 잘 선택한 책이다.

'인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것 같은 과정이다.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노년기의 지혜는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책임이다.'


김형석 교수님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보니 국민일보에 이렇게 소개가 되어있다.

환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 천천히 말하면서도 자신의 언어에 찔릴까 배려하는 자세, 고단함에 대한 위로, 산책과 절제를 통한 몸가짐 등에서 배어 나오는 '아름다운 노년의 표상'이다. 오래된 것은 보석이 된다고 했던가.


오래되면 썩는 것이 있는데 오래되어 보석이 되는 사람이 있다. 미소와 배려, 절제로 아름다운 노년의 표상이다. 책에도 그분의 그런 향기가 가득 담겨있다. 


느지막이 영화 조커를 봤다.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유명하다던 한 줄 평을 읽었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 같지만, 포기하고 내려갈 때는 너무나도 빠르고 즐겁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이 한 줄 평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의 음악에 또 한 번의 소름을 느꼈다. 

영화 초반부에는 애잔함이 가득하였고 어쩌면 그에게 동감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어떤 사건의 계기로) 폭주하는 그를 보는 것은 참으로 고역스러웠다. 잘 만든 영화, 주연 배우의 연기에 엄지 척하게 되는 영화. 끝나고 내내 그의 웃음 (분명 소리내어 웃으나 몹시도 괴로운 몸짓으로 우는 건지 웃는 것인지 모를 그 웃음소리)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 끝나고 아래층에서 피자를 사서 방으로 가 맥주와 함께 저녁으로 먹었다.


한 달여 만에 도착한 갤럭시 탭으로 드디어 그림을 그리며 일기를 쓴다.


주말 저녁이 조용히 거리에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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