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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Jun 14. 2021

돌이켜보면, 모두 나를 버리는 과정이었다.

인생에 대처하는 가장의 자세


돌이켜보면, 모두 나를 버리는 과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가 타인의 주목을 받는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주목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유년기를 보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순히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과 같이 성적과 연관이 있었다. 성적지상주의의 환경은 나보다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에 길들여지게 했다.


그것이 무너졌다고 생각해버린 것은 바뀐 입시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뒹굴 무렵이었다. 고3 시절 나의 자존감은 거의 바닥이었다. 결국 나는 대학 입시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나 자신도, 남의 기대도 채우지 못한 채, 나의 고교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맞은 대학생활에서 나는 고교시절의 실패를 대학생활에서도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조용히 했었다.

그런 대학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결심대로 너무 열심히 대학생활을 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즈음에 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결과를 얻었고, 그렇게 다시 주목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스물일곱에 첫 직장에 입사를 했을 즈음,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믿었던 나 자신은 그 조직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더 잘 난 사람도, 더 뛰어난 사람도, 더 운이 좋은 사람도, 빽이 좋은 사람도 아주 많은 곳에서, 나는 그냥 그저 그런 직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애가 되지 않으려고, 그저 그런 대학에 가지 않으려고, 그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저 그런 직장에 가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나는 다시 그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회사 내에서는 한참 움츠려 있다가, 회사 밖에 나와서는 그 회사 뱃지를 달고 있는 내가 부풀어 올랐었던 모순된 생활을 한동안 이어간 후, 나는 이직을 하게 되었다. 


결혼 생활도 나를 버리는 과정이었다.

결혼을 한 직후, 바로 내 위주의 생활 패턴은 바로 무너졌다. 

모든 것을 함께 생각해야 했고, 행동의 주체는 같이 였으나, 종종 책임은 거의 혼자 져야 했다. 

내가 만족했다기보다, 동거자의 충분을 충족시킬 때까지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점점 나는 없어져갔다. 

아마도 결혼 초기의 우울감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은 더 무거웠고, 그 기대도 버거웠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같이 해야 하지 않나, 라는 유치 섞인 투정은 실생활에서는 적용되는 결이 달랐다.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추는 완전히 기울었다.

결혼 초기에는 배려해야 되는 대상이 온전해 보이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을 이어가면서 그 대상은 점점 불안정한 상태로 되어갔다. 그만큼 나의 배려에 대한 의무의 시간과 강도는 점점 더 길어지고 커졌다.

그런데 이제 그 배려의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은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것. 그건 마치 나를 다 쪼개는 듯한 부담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를 버리고, 포기해야 모두가 살았다.

나의 시간과 생활, 모든 삶의 패턴들이 모두 다른 것을 위해 없어지고, 아예 바뀐다는 것은 정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과정이었다. 아이가 생겼을 때의 우울감 역시 상당 부분 그것에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첫 아이의 유아기는 나에게도 정신적인 공황 상태로 남아있는 시기였다.


나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을 고사하고, 내 책임감 또는 직장을 위해 했었던 일마저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나를 무력하게 했다.

모든 것을 놓고 퇴근하는 날이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서, 내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온다는 것. 내가 젊은 시절 무책임하다고 욕을 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내가 닮아 가고 있다고 자각하고, 그래서 내가 다시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인정해야 되는 시점에 놓이게 되는 것. 그것은 정말 수치스러웠다. 


어느덧 집에서도 내 목소리를 크게 낼 때면, 항상 마찰이 생겼다.

모든 일에 있는 듯 없는 듯 동의하고, 공감 아닌 공감을 마지못해라도 할 때 비로소 주위가 고요해졌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그렇게, 그저 그렇게.


이렇게 내가 없어지다가 어느덧 내가 나를 위해 다시 시간과 정신을 쏟아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땐 정신적인 허기를 또다시 느끼겠지

그땐 혼자인 게 더욱 외롭고 쓸쓸해져 버릴 수도 있겠지. 정작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더 움츠려 들게 되는 때가 될지도 모르겠다. 또 이미 그런지도.

그럴 때의 나의 본질은 다시 스스로가 익숙했던 내가 아닌, 다른 것들과 비비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나로 아예 변해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삶은 매번 내가 깨어지고 없어지는 과정이라는 것.

그렇게 내가 대단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그렇게, 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임을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게 기쁘던 슬프던, 또는 아무렇지 않게 흘리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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