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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May 12. 2017

배우 김영애를 추모하며

[대중문화 이야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4월의 봄날, 배우 김영애가 눈을 감았다. 9일 오전 10시 50분, 향년 66세. 11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절차를 마친 뒤 가족과 동료의 배웅 속에 김영애는 세상과 작별했다. 사인은 췌장암 합병증이다. 2012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한 뒤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사실 업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김영애의 병세가 악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난해부터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져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김영애는 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작품활동에 매진하며 삶의 마지막을 멋스럽게 장식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끝까지 단정하게, 그리고 품위있는 모습을 보여준 이. 그래서, 영정 사진 속 김영애의 환한 웃음이 남겨주는 아쉬움의 크기가 더 커진다.



마지막까지 뜨거웠던 배우

김영애의 영결식은 생전 그가 다녔던 교회 관계자들과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식으로 진행됐다. 개그우먼 이성미, 배우 나영희와 오달수 임현식 염정아 문정희 윤유선 등 연예계 동료도 함께했다. 앞서 장례식장에는 송강호 정우성 전도연 신구 나문희 김용건 송일국 이동건 조윤희 박신혜 김원해 김혜자 등 배우들의 조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장례식 전반에 걸쳐 유족은 고인의 영정을 외부에 따로 공개하지 않았으며 영결식 역시 비공개로 조용히 진행했다. ‘배우 김영애’의 품위와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던, 고인의 바람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김영애는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거동이 힘들어진 상황에서도 촬영장을 떠나지 않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 2월 종영한 KBS2 TV 주말극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 출연하며 투혼을 보여줬다. 종영을 앞둔 시점에 병세가 악화해 끝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6개월에 이르는 연속극의 장기 레이스를 소화하며 정신력의 위대함을 알렸다.


심지어 2016년에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이전에도 SBS ‘닥터스’, JTBC ‘마녀보감’ 등 미니시리즈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미리 촬영을 마친 후 개봉 시기를 타진 중이었던 영화 ‘판도라’까지 마침 지난해 연말 공개됐다. 그러니, 이렇게 바쁘게 연기활동을 하는 배우를 두고 그의 건강상태를 의심하는 이는 드물었을 터.



다만, 업계 내에서만 김영애의 생명이 저물고 있으며 그의 마지막 선택이 연기에 매진하는 것이란 사실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이미 ‘마녀보감’ 촬영이 시작될 때도 김영애의 몸 상태는 극도로 나쁜 상태였다. 그럼에도 김영애는 “마지막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입장을 확고히 했으며, 누구도 그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배우를 그저 병 들었다는 이유로 캐스팅하지 않을 이도 없었다. 이후로 이어진 두 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작품에는 배우 김영애가 필요했고, 동료는 김영애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했으며, 무엇보다 이 중견배우의 멋진 연기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을 것이다.


불꽃 튀는 언론의 인터넷 단독기사 경쟁 속에서 행여나 연예부 기자들이 김영애의 병세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며 그의 연기 혼을 꺾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던 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김영애의 주변 동료와 작품에 관계된 이들은 더욱 말을 아끼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끝에 김영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관련 기사가 불거져 나왔다. 그러면서 김영애의 상태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 것은 상당수의 연예부 기자들이 김영애의 병세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기사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품격있는 연기, 명예로운 퇴장

마지막까지 연기에 충실함으로써 가장 명예롭고 품격있는 퇴장을 택한 배우. 배우이기 전에 약하디 약한 인간이기에 그 결정과 행보가 쉽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말로 표현 못 할 고통이 온몸에 펴져 나가고 정신마저 온전히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작품에 몸을 던지고 현장인력들과 함께 완주한다는 건, 자만과 이기심으로 프로페셔널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주는 수많은 동종업계 후배들에게 큰 교훈이 될 만하다. 그래서 김영애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그 뜨거운 투혼에 대한 박수와 이 멋진 배우를 잃어버린 안타까움이 공존했다.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의 ‘앵커브리핑’ 코너를 통해 앞서 2009년 타계한 배우 여운계와 함께 김영애를 추모했다. 손석희 앵커는 “1970년대 초반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JTBC의 전신인 TBC의 드라마 스튜디오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무렵, 김영애와 같은 아파트와 함께 살았으며 자그마한 상점에서 가끔 마주쳤던 김영애는 어린 고등학생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만했다”고 추억했다. 이어 “훗날 같은 방송에서 일하면서도 그녀를 볼 기회는 없었다. 병환 소식을 들었을 때 우연히라도 만나면 당신의 그 찬란했던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영애의 영결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그의 찬란하게 빛났던 시기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의 젊은 시절이 아니라 바로 삶과의 이별을 앞두고도 치열했던 노년이었기 때문이다”며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존재다’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다’. 그 옛날 20대 초중반의 김영애였다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에 전력을 다했던 사람만이 부끄럼 없이 내놓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세상의 많은 이들이 업이 아닌 업보의 길을 갔을 때 고통스러워도 당당하게 업의 길을 간 사람”이라고 김영애의 명예로운 마지막 모습을 추모했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김영애의 남편을 연기했던 배우 신구도 “녹화하러 와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포옹을 하면 너무 앙상해 안타까웠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참고 입원한 상태에서도 녹화를 위해 촬영장으로 왔다.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차인표는 연합뉴스TV에 촬영장에 있던 김영애의 모습이 찍힌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영상 속에서 김영애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 후배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고 있다. 김영애의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 극히 악화한 병세를 짐작게 한다. 또한, 차인표는 “이 영상은 선생님이 50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자로서 맡은 바 책임과 소임을 다하신 김영애 선생님 같으신 분이야말로 이 시대의 귀감이 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존경의 뜻을 밝혔다.                  

                                          


젊은 시절 김영애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배우였다. 그 특유의 우아한 표정과 지적인 이미지로 멜로 장르의 여주인공을 독차지했다. 차츰 나이 들어가는 동안 김영애는 자연스레 시간을 흐름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맡아 표현했다. 억지스럽게 젊은 시절의 미모를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주름을 드러내며 엄마 역할을,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할머니 역을 소화했다. 세월을 받아들인 배우의 연기력은 그 깊을 더해갔고 매 작품 속에서 김영애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 만한 표현력으로 오롯이 배우 본연의 모습을 어필했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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