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쿡방’과 ‘여행 예능’도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배낭 하나 메고 어디든 훌쩍 떠나는 식으로 진행되던 여행 예능의 기본 콘셉트가 국내외 할 것 없이 다양한 장소를 넘나들고, 또 출연자 연령대 폭을 넓히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더니 급기야 여행사 패키지 프로그램에 몸을 싣고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던 데 그쳤던 ‘먹방’이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쿡방’으로, 그리고 어촌이나 산골에 자리 잡고 삼시세끼를 직접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하기도 했다. 지금 ‘쿡방’과 ‘여행’이 잘 결합한 또 한 편의 프로그램이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 tvN ‘윤식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여유로운 휴양지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식당을 운영하는 네 명의 연예인들을, 특히나 매출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한가롭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위 ‘MSG’라 불릴만한 자극적인 재미요소는 찾아볼 수 없고 포복절도할 만한 웃음도 없다. 온통 여백뿐인데도 대중이 열광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방송분은 무려 16.4%(닐슨코리아 수도권 유료가구)까지 시청률이 치솟았다.
여유롭고 또 여유롭고, 눈은 뗄 수 없고
‘윤식당’은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 인근 길리 트라왕안 섬에서 윤여정-신구-이서진-정유미 등 배우 4인방이 한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예능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의 해외여행을 다룬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그리고 어촌과 산골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삼시세끼’ 등 나영석 PD가 내놨던 히트작의 특성들을 잘 버무려 낸 콘텐츠다. 프로그램의 콘셉트만 일부 차용한 게 아니라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신구, ‘꽃보다 누나’에 캐스팅됐던 윤여정, ‘삼시세끼’와 ‘꽃보다’ 시리즈 전체에 걸쳐 나영석 PD와 호흡을 맞췄던 이서진이 이번에도 함께했다. 여기에 정유미가 새로운 인물로 투입돼 활력소 역할을 한다. 나영석 PD가 후배 이진주 PD와 공동 연출자로 나섰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해도 사실 프로그램의 주요 스태프나 출연진, 콘셉트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해외 휴양지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네 명의 배우. ‘윤식당’은 사실 그게 전부다.
말 그대로 ‘윤식당’은 그저 네 명의 배우들이 휴양지에서 메뉴를 개발하고 음식을 만들고 서빙을 하고 식당 정리를 하고 일을 마친 뒤 쉬는 모습을 ‘별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공들여 준비해 오픈한 ‘윤식당’ 1호점이 현지 사정으로 철거돼 부랴부랴 새로운 촬영지를 알아보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틱한 사고 외에 ‘윤식당’이 보여주는 화면은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때로 손님이 많이 몰려 분주해지고 또는 손님이 없어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다. 거리는 조용하고 바다도 잔잔하고 누구 하나 떠드는 사람 없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윤식당’ 멤버들도 그 여유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현지에 동화된다. 다양한 메뉴를 개발하고 요리 연습을 하고 청소를 하는 등 식당 운영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손님 한 명을 더 받으려고 요란을 떨며 영업을 하지는 않는다. 장르가 예능이란 사실 때문에 일부러 웃음을 자아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하고 또 평화롭다.그 정도로, ‘윤식당’은 ‘별것 없는’ 프로그램이다. 나영석 PD가 기존에 보여줬던 ‘꽃보다 할배’나 ‘삼시세끼’가 곳곳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등 예능 프로그램이 가지는 최소한의 유머코드를 활용했던 데 반해 ‘윤식당’은 그 ‘최소’의 노력마저도 하지 않고 일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희한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한 번 보면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 특별할 건 없는데 그 안에 현대인의 로망을 잘 반영해 ‘일상탈출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일상탈출 욕구 대리만족
‘윤식당’은 팍팍한 현실로부터의 행복한 도피, 여행지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아 살아보고 싶은 상당수 한국인의 열망, 그림 같은 풍경의 일부가 돼 느릿느릿 하루를 보내고 싶은 백일몽을 영상에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새파랗고 맑은 빛깔의 바다, 깨끗한 백사장과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길거리, 그리고 작은 가게와 시장 등. 천국 같은 휴양지의 정취와 함께 그곳에서 마치 현지인처럼 가게를 차리고 휴가를 즐기러 온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한국 배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을 통해 묘사되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은퇴 후 여유를 찾은 것처럼 평화롭기만 하다. 특히나 어수선한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그래서 ‘능력만 있다면 떠나고 싶다’고 마음먹는 이들이 느는 현실 속에서 ‘윤식당’은 잠시나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해 휴식처의 역할을 해준다.글의 시작단계에서 ‘윤식당’을 두고 ‘쿡방’과 ‘여행 예능’의 절묘한 결합, 그리고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기획, 연출, 포맷, 편집 등 콘텐츠 전반을 살펴보면 ‘진화’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듯하다.
여행 예능의 발전단계만 살펴봐도 그렇다. 야외 취침을 일삼으며 ‘야생버라이어티’를 표방한 ‘1박 2일’에서, 할아버지들의 해외 배낭여행을 보여준 ‘꽃보다 할배’, 이어 패키지여행을 소개하는 ‘뭉쳐야 뜬다’ 등의 단계로 여행 예능은 변화를 거쳤다. 이어서 ‘윤식당’이 아예 여행지에 정착하는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이 정도면 여행 예능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물론, 그전에도 해외 현지에 자리를 잡고 살아보는 식의 시도가 예능계에서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해당 포맷이 화제가 되거나 선례로 남았던 경우는 전무하다.
앞서 ‘삼시세끼’ 시리즈를 통해 차승원과 에릭 등 연예계의 숨은 요리사들을 찾아 보여줬던 나영석 PD는 이번에 70대 원로배우 윤여정에게 주방을 맡기고 음식을 만들어 보라고 시켰다. 그렇게 만들어낸 ‘윤식당’의 메뉴는 불고기, 파전, 라면, 프라이드 치킨 등 외국인들도 부담없이 맛볼 수 있는 무난한 요리로 한정됐다.
종류 면에서나 또 요리 과정의 볼거리 등을 따졌을 때도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이 보여준 ‘쿡방’의 재미에는 미치지 못한다. 맛에 대한 묘사는 ‘삼시세끼’에 비한다면 거의 생략됐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데도 ‘윤식당’의 음식들은 현지의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묘하게 식감을 자극한다. 음식을 먹는 이들이 식당을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이라서, 그래서 방송과 무관한 이들로부터 리액션을 요구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맛에 대한 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음식의 맛은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인 쾌감을 안겨준다.반복적으로 끓여대는 윤여정의 라면, 정말로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뻔한 프라이드 치킨이 침샘을 폭발시키는 이유다. 굳이 화려한 조리 과정을 보여주거나 과도한 리액션을 통해 맛을 묘사하지 않고도 시청자들을 만족시키는 방송, ‘쿡방’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찾아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윤식당’의 이런 장점들을 제작진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영석-이진주 두 연출자는 오히려 시키는 대로 착착 음식을 만들어 내는 윤여정과 평소와 달리 불평불만 없이 열심히 식당 운영에 집중하는 이서진을 보며 당황했다고 한다. 식당 운영보다도 오히려 출연자들이 일탈을 통해 만들어 내는 재미있는 캐릭터의 완성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연출자의 말에 잘 따라주는 출연자들을 보며 ‘망했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라니. 제작 과정에서도 한가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프로그램. 하지만, 그들도 한국으로 돌아와 편집을 시작하면서야 알게 됐을 것 같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고생하며 카메라에 담아온 화면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정달해 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