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국내 극장가를 뒤흔들며 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의 영예를 누리며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프레디 머큐리 역을 소화한 주연배우 라미 말렉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오스카 수상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됐다. 세계적으로 얼굴과 이름을 알리게 된 첫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마블의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물 '블랙팬서'도 이 장르의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무려 3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눈길을 끌었다. 영화 '로마'도 감독 알폰소 쿠아론에 안겨준 감독상을 비롯해 총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린북' 역시 작품상과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수년에 걸쳐 불거진 인종차별 논란을 의식한 듯 흑인과 백인이 조화롭게 무대에 올랐으며, 수상자와 수상작 선정에 있어서도 특유의 보수적인 아카데미 취향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려 노력한 흔적을 보여줬다.
'보헤미안 랩소디', 아카데미 다관왕 등극
지난 25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단연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9천500억원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인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관객수 1천만 돌파를 목전에 뒀을 정도로 크게 성공하며 그룹 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성추문에 휘말려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그 외에 이 영화를 둘러싼 부정적인 요인은 없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는 남우주연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 편집상을 수상하며 4관왕이자 제91회 행사 최다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은 무대에 올라 "이 자리에 와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제 모습을 보고 계실 것 같다"면서 "제게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룹 퀸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전설의 작은 부분에 동참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민자 출신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앞길을 개척했던 프레디 머큐리처럼 나 역시 이집트 이민지 출신으로 이 이야기에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또한, "루시 보인턴이 이 영화의 중심에 있었고 나를 사로잡았다"면서 실제 자신의 여자친구인 배우 루시 보인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루시 보인턴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라미 말렉이 연기한 프레디 머큐리의 연인 메리 오스틴을 연기했다. 라미 말렉과 루시 보인턴은 극중 연인관계를 연기하다 실제 커플로 발전했다. 라미 말렉은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자신이 호명되자 옆자리에 있던 루시 보인턴에게 입을 맞추며 연인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이날 라미 말렉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바이스'의 크리스천 베일, '스타 이즈 본'의 브래들리 쿠퍼, '그린북'의 비고 모텐슨, '앳 이터너티스 게이트'의 월렘 대포 등 쟁쟁한 명배우들과의 경합에서 이긴 결과라 더욱 화제가 됐다. 2005년 '워 앳 홈'으로 데뷔한 라미 말렉은 '보헤미안 랩소디' 한 편으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이름과 얼굴을 명확히 각인 시킨 것은 물론, 배우로서 최정상 위치에 오르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2005년 '워 앳 홈'으로 데뷔해 주로 조연 캐릭터를 연기하던 라미 말렉은 '미스터 로봇' 등의 드라마의 주연급 캐릭터를 맡으며 미국 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2017년작 '빠삐용'에서 주연급 캐릭터 드가를 연기했고 북미를 넘어 아시아권에서까지 성공한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 자신을 알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톱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네 번이나 노미네이트에 그쳤다가 다섯 번 만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어려운 걸 라미 말렉이 단번에 해냈다.
인종차별 논란 의식한 듯 다양성에 중점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특히 다양한 인종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 주목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백인 위주의 시상식이라고 비난 속에 급기야 흑인 영화인들이 보이콧까지 선언하던 아카데미의 바뀐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하는 듯 했다.
일단 수상작과 수상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뒀는지 잘 알 수 있다. 먼저 작품상을 수상한 '그린북'은 천재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흑인 음악가 돈 셜리와 허세로 똘똘 뭉친 운전기사 토니의 우정을 그린 영화다. 흑인이 백인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뤘으며 무엇보다 실화를 영화화해 눈길을 끌었다. 4관왕의 영광을 누린 '보헤미안 랩소디'도 이민자 출신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3개 부문의 상을 받은 '로마' 역시 멕시코 출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멕시코 배우들과 멕시코 로케이션을 통해 완성시킨 작품이다. 게다가 '로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극장 개봉을 우선시해 만들어진 타 영화와 궤를 달리했다는 차원에서 노미네이트됐을 때부터 자격 요건에 대한 찬반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어찌됐든 '로마'에 주요 3개 부문 상을 몰아주며 가치를 평가했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그들만의 고지식한 주관을 버리고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는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 부를 만 하다. 인종 문제를 벗어나 또 다른 의미에서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흔적을 남긴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흑인 슈퍼히어로를 내세운 '블랙팬서'의 3개 부문 수상 역시 짚고 넘어갈 만하다. 이 영화는 작품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가 의상상, 미술상, 음악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비록 작품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슈퍼 히어로를 등장시킨 블록버스터 영화로 이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 면에서 인정받았음을 입증한 셈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에 오른 것 자체가 처음이다. 게다가 흑인 캐릭터들을 부각시킨 영화로 의상상, 미술상, 또 흑인들의 전통적인 리듬을 가미한 사운드로 음악상을 받았다는 것 역시 아카데미의 다양성 존중에 대한 취지가 적절히 반영된 결과로 해석가능하다.
그 외에도 이번 시상식에서는 남녀조연상도 흑인배우들에게 주어졌다. 남우조연상이 '그린북'의 마허샬라 알리에게, 여우조연상은 '이프 빌스트리트 쿠드 토크'의 레지나 킹에게 돌아갔다. 각색상을 받은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도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다.
또한, 전체 시상자의 절반을 흑인 배우들과 영화인들로 채운 시도 역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목할만한 작품이나 배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 부문 노미네이트 대상에 백인들만 내세워 비난받던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로 처음 후보에 오른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여우주연상 수상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국내에는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인기나 유명세와 거리가 있는 배우였지만 이번 영화로 단번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손에 쥐며 주목받게 됐다. 콜맨은 이 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영국 아카데미, 미국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까지 휩쓸었다. 아카데미 역시 콜맨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례적으로 MC 없이 진행됐다. 여러모로 변화의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었다. '스타 이즈 본'의 감독이자 주연배우로 1인 2역을 해낸 브래들리 쿠퍼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가수 레이디 가가의 축하무대 또한 시상식을 빛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