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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zelnut Jul 27. 2020

서로 다른 생채기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미영이는 따끔거리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육교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팔꿈치에 피가 몽글몽글 올라온 자국이 선명하다. 엄마를 이리 저리 흔들며 돈을 내놓으라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생긴 영광의 상처다. 20여분이 지나자 미영이에게 해맑게 뛰어오는 친구가 나타났다.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두 팔은 마냥 보고만 있던 사람도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미영이 옆에 바짝 붙어서 멈추는 혜지는 천진하게 미영이를 이리저리 흔든다. “오래 기다렸어? 미안, 담임이 종례를 또 늦게 해줬어” 귀엽게 우는 표정을 짓는 친구를 미영이는 본체만체 한다. 한참이 지나서야 혜지에게 고개를 돌린 미영이는 깜짝 놀랐다. 


“얼굴이 또 왜이래? 담임이 뭐라고 안해?” 혜지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결국 너 말대로 한 두번씩 대들어 봤어. 눈도 똑바로 쳐다보고, 도망가지도 않고. 그랬더니 결국에는 얼굴까지 건드리더라. 담임이 깜짝 놀라서 교무실에 데려갔는데, 내가 아무 소리 안 했어.” 미영과 혜지가 처음 만났을 때도 서로를 상처로 알아봤다. 장소는 병원이었다. 집에서 생긴 상처에 둘다 담임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응급실에 와 있던 참이었다. 미영이는 갈비뼈에 금이 갔고 혜지는 다리를 절었다. 우연히 병원에서 만났지만, 둘은 서로 같은 학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봤다. 한두 번 마주칠 때마다 왜 생긴 상처인지, 어떻게 맞았는지, 이번에는 뭘 잘못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사실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이미 서로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 수 있었다.


혜지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혜지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계셨다. 시험 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혜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손은 물론이고 다리, 입술, 온 몸이 떨렸다. “잘했네,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라는 한 마디를 남기시곤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 뒷 모습을 보면 그제서야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몇 안되는 칭찬 받는 날을 빼 놓고서는 잠잠히 지나갈 수 없었다. 손 바닥에서 피가 나거나 더 이상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매를 맞아야 했던 날들이 더 많다. 이렇게 아버지가 매를 드는 날은 양반이다. 아버지의 큰 손이 주체할 수 없게 혜지의 몸뚱어리를 후려치는 날에는 어머니가 울며 불며 달려들어야 끝이 나곤 했다. 


미영과 혜지는 서로에게 얼만큼 맞았는지, 어떻게 맞았는지 설명하는 것이 인사였다. 위로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얼만큼 아팠는지, 얼만큼 무서웠는지 쏟아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담임이 아무리 도와주겠다고 물어봐도 떨어지지 않던 입이 같은 상처를 가진 친구 앞에서는 끝도 없이 열렸다. 미영과 혜지는 종종 육교 위에서 학교 친구들을 바라보곤 한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 조차 잘 가지 않는 높은 육교 위에서 친구들을 보면 한 뭉터기 같다. 모두가 우리와는 다르게 행복해 보인다. 매일같이 행복하게 웃는 친구들을 보며 미영과 혜지는 매일같이 지옥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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