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1. 로스 아르꼬스(Los Arcos) 가는 길
전날 저녁, 주인장이 아침 식사를 마련하고 갔다. 혹시라도 빵이 바닥나지 않을까 싶어 미리 빵 하나를 챙겼다. 아침에 보니, 아,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주인장이 보온병에 타놓고 간 커피도 동났고, 다른 먹을거리들도 아슬아슬하게 남았다. 하필 어제 우리가 챙긴 빵만 많이 있었다. 이렇게 감각이 없어서야! 늦게 일어난 죄다.
전날 일찍부터 문을 닫았던 슈퍼로 갔다. 알베르게 에서 열 걸음 걸으면 꼬꼬마 버스 정류장, 거기서 스무 걸음 거 가면 미니 슈퍼가 있다. 과일 하나에 치즈, 작은 문방구 규모에서 뭘 살까 고민 중일 때 동네 아저씨들이 괜히 아는 척을 한다. 알고 보니 신부님! 고요한 마을, 꽃단장한 집들이 평화로움을 전해주는 이곳에서 신부님도 많이 심심했는지, 사람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규모가 있는 마을과 달리 경유지 같은 이 작은 마을에는 성수기에도 순례자가 넘치진 않은 듯했다. 알베르게 규모로 짐작해 보았을 때! 그래서인지, 동네 아저씨들이 순례자를 대하는 표정이 ‘반갑다, 친구야!’였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수다와 함께 '부엔 까미노!'가 시작되었다.
아임 파인 땡큐, 엔쥬?
햇빛을 피할 만한 나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결전을 치를 시간이 다가왔다. 이따금 자전거로 순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구간에 자전자 순례자가 많은 걸 보니 길이 괜찮은가 싶었다. 걷는 이들에게는 조금 지루한 구간인데 말이다. 평탄하고 넓게 뻗은 길을 걷다가 어째 산길로 방향이 틀어졌다. 좁은 오르막으로 접어들어 고불고불 나무 계단이 어중간하게 박혀있는 길이다. 투박한 등산화에 스틱이 꼬이지 않게 조금 신경을 써서 걸어야 했다.
드디어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흙길에 박힌 나무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언덕 위에서 자전거 부대들이 좁은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무 계단 옆 흙길, 아주 좁은 가파른 길로! 한 사람 간신히 통과하는 폭이다. 발 하나를 반대쪽으로 빼고 기다려야 했다. 내리막인데도 자전거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우리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고맙다고 소리쳤다. 다섯 대 정도가 지나가고 이제 끝났지 싶어서 걸으려고 돌아설 때였다. 위에서 또 다른 자전거 소리가 들렸다. 얼른 원위치로 가서 그들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멀리서 모습을 보인 자전거 탄 남자가 미안하다며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혹시 뒤에 누가 또 있나요?”라고 크게 물었다. 그저 ‘아니!’라든가, ‘응!’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계속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려왔다. 어디로 피할 수 없는 내리막 길, 꼼짝없이 서있다. 이곳이 약간 휜 구간인 듯, 아까 내려간 자전거들도 아슬아슬 지나쳤는데, 하필 여기에 우리를 꼼짝없이 가두게 된 것이다. 바람이 휘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위협을 느꼈다. 앞선 사람들보다 브레이크를 덜 잡은 것인지, 정말 빠르게 통과했다. 하마터면 내 배낭을 칠 뻔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일은 그때 벌어졌다. 분명 우리 곁을 통과한 자전거가 갑자기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아, 이게 무슨 일이지? 나와 세미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악!”
정적이 흘렀다. 그의 동료들도 저 아래 평지에서 기다리다가 돌아봤다. 그가 죽었으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등으로 퍽 떨어졌다. 그를 일으키고 싶어도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한 가파른 계단 위에 서있었다. 배낭 무게도 무게지만, 스틱과 등산화가 꼬여서 빠르게 내려갈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자기 정신이 아닌 상태로 놀라서 일어난 듯했다. 그가 자전거를 끌어안고 등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등이 부러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돌이나 나무 계단에 다친 건 아니었다. 흙길로 떨어졌지만 충격은 컸을 것이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났지만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휙 하고 다시 쓰러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멀리서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가 등을 쓸어보더니,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 손을 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당신도 괜찮죠?”
그는 창피해서인지 서둘러 산길을 내려갔다. 아,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세미와 나는 얼얼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가 흔히 영어회화 농담으로, 차에 치었을 때도 “괜찮냐?”하고 물으면 “응. 괜찮아? 너는?”하고 되묻는다더니! 마치 그런 농담을 구현한 듯 그는 전혀 안 괜찮을 것 같은 상황에서 손을 들어 보이며, 그 와중에 당신도 괜찮죠?라고 물었다. 아임 파인 땡큐! 그래, 제발 ‘파인’ 이면 우리가 ‘땡큐’겠다. 그런데 이 와중에 엔쥬?라고 묻지 않아도 돼! 지금은 자신을 돌볼 시간이니까!
괜히 마음에 걸렸다. 동료와 사라진 그였지만, 그의 쓰러진 자리의 잔상!
“많이 아플 것 같은데! 내 물음에 답하려다가 저리 됐나 봐!”
마음이 편치 않은 나를 세미가 위로했다.
“아니야. 여기는 가파른 내리막이야. 속도를 줄였어야지, 저 사람이 세게 달려왔잖아. 우리까지 다칠 뻔했어.”
“브레이크를 급히 잡아서 날아간 거 같아! 자전거가 새처럼 나는 걸 처음 봤어.”
“자전거 타는 사람이 브레이크 작동법을 모르면 되나? 산악자전거는 원래 위험해! 저 사람은 안 다쳤잖아!”
“창피해서 그냥 간 게 아닐까? 나중에 아파서 누울지도 몰라!”
“그렇지 않을 거야!”
세미와 나는 이런 대화를 한동안 하다가 터벅터벅 내려왔다.
세미는 명상도 하고 마음공부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녀가 문득 나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했지만, 나 역시 세미를 만난 게 고마운 일이었다. 친구가 마음을 다독여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혼자였다면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을 테다. 죄책감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친구의 말 한마디가 힘을 준다.
지나가는 나그네
평지에 들어섰을 때였다. 돌아보니, 완만한 길로 내려오는 길도 있었다. 화살표가 지름길로 안내된 것인지,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가 나온 것 같다. 다시 넓은 길이 펼쳐져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휘청일 정도였다. 지대가 그런 것인지, 어디서 이런 바람이 숨어있다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인지!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가 아니라, 머리통을 통째로 날릴 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항력이 만만치 않았다.
바람막이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복서처럼 조여 맸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우린 저항력을 최대치로 끌어다가 쓰느라 걷는 게 좀 우스꽝스러웠다. 이러고 걷는 게 왜 그토록 웃기는지, 마치 ‘드루먼 쇼’에서 누군가 우리의 걸음을 막기 위해 맥락 없이 바람을 끌어다가 코 앞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세미와 난 힘을 주어 걷느라 “꺄꺄꺄” 소리를 냈다. 하하하 웃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괴상하게 나온 것이다. 언제 마음이 무거웠냐는 듯! 세미와 나는 신나게 걸었다. 나이를 먹어도 놀거리가 생기면 적극 가담하는 스타일, 세미는 나와 참 많이 닮았다. 아무도 없는 길, 둘이서 넓은 길을 누볐다. 바람 따라왔다 갔다 쪼르르 밀리며 두 팔 벌려 오가다 보니 새처럼 나는 듯했다. 급기야 소리까지 지르며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럴 때 등장인물이 있다. 작품으로 치면 참으로 작위적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계속 지나가겠습니다! 뭐 그런 쓸 때 없는 등장일 수 있다.
“부엔 까미노!”
등 뒤에서 들리는 반가운 인사! 내리막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한국인! 두둥! 우리들의 허접한 액션들을 다 봤을 거라는 생각에 창피했다. 아까만 해도 사람이 없었는데!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원래부터 정신줄 멀리 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고막이 터져라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데 잘됐다. 머리카락이 적당히 미역 줄거리처럼 얼굴에 얹혀서 잘 가려줬다. 누가 보면 낮술이나 했을 법한 행태와 몰골이었다.
“부엔 까미노!”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신 것 같은데? 맞나요? 반가워요!”
“아, 한국인이세요? 영어로 얘기하셔서 몰랐어요.”
“이 친구는 대만인이고, 저는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 한국인입니다.”
우린 바람 때문에 서로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바로 앞에 있어도 크게 소리를 질러야 들릴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싸대기를 날리고 있었다. 난 아예 등을 돌려 뒤로 걸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인사만 하는데도 한참을 웃어댔다. 바람 때문에 그의 멀쩡한 얼굴이 빙구처럼 구겨졌다. 그가 헤벌쭉 웃다가 앞서 걸으며 먼저 가겠노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야말로 지나가던 나그네, 과객이었다. 인사를 하고 다시 바람과 맞짱각인데, 그가 갑자기 회전문처럼 몸을 휙 돌려 우리 앞에 섰다.
“두 분, 사진 찍어 드릴까요?”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사진 찍을 생각을 하다니! 사진을 좋아하는 내가 봐도 감탄스러운 의지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진을 찍어준다는 것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홀린 듯 그러마 했다. 사실 세미와 내가 함께 찍은 전신사진은 많지 않았다. 그가 그런 것까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나?
“고마워요. 대신 우리도 찍어 줄게요. 혼자 다니면서 몸통 사진 못 찍었죠?”
그가 “하하하” 웃어대며 고맙다고 소리쳤다.
앞서 걷는 모습, 뒤돌아 바람을 헤치며 걷는 모습! 만족스러운 양팔 브이 샷의 향연! 그리고 다시 그를 불러 세운 한 마디!
“다 모여!”
얼굴 덩그러니 세 사람의 셀카가 완성되었다. 바람 때문에 모자 뒤집어쓴 모습이 그야말로 ‘멍청이’처럼 나왔지만 에너지가 좋아서 만족스러운 사진이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하면 사진을 보내주기로 하고,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일정이 비슷하면 마을에서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빠듯한 일정은 오늘 우리보다 두 배는 더 먼 곳에서 끝내야 했다.
바람 같은 짧은 축제는 끝났다. 혼자 걸어온 사람들은 이런 별 거 없는 만남에도 감사한 미소를 지었다. 삶이라는 거친 길을 오래도록 홀로 걸어온 사람들은 길벗이 흔드는 손인사에도 감동한다. 그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길! 길 위에 선 마지막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다음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
얼마간 걷자 해가 뜨고 바람이 숙여졌다. 정말 알 수 없는 날씨다. 저 앞으로 짐을 실은 당나귀가 엉덩이를 털레털레 흔들며 걷는 게 보였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공사장 돌멩이들을 싣고 비탈길을 덜덜덜 떨며 내려오던 당나귀가 생각났다. 어린 녀석이 처음인지, 발을 달달달 떨며 내려오다가 멈춰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끄러져서 비탈길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과 위치, 나는 길을 가다가 멈춰서 그냥 울었다. 어린애도 아닌 사람이 이게 무슨 추태인가. 당혹스러운 눈빛의 당나귀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도 그냥 같이 울었다.
‘다음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
달라이라마의 법문에 한창 몰입하던 때였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라 했다. 천상계에서 태어나면 너무 만족스러워서 정진할 수 없고, 축생계에 태어나면 아예 기회조차 없다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게 축복이라고 했지만, 이 고통스러운 삶은 어쩔 것인가? 잘 먹고 잘 사는 천상계에 태어나면 장땡 아닌가 싶었는데! 내 얄팍한 지성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가르침! 짐승은 정말 죄를 지어서 그리 태어났을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바들바들 떨고, 인간에게 굴려지다가 생을 마감은 것도 너무 슬프다. 사람으로 태어난 행운으로 수행에 전념하라지만, 나는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맑은 눈을 가진 소와 사슴과 당나귀와 강아지, 그래, 낙타의 눈도 봤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착한 눈들은 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날들에 그저 눈물만 흘리며 당나귀에게 말했지!
"넌 짐승이라 서럽냐? 난 인간이라 서럽다."
서러움을 함께했던 그 당나귀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사과 한 알의 기적
세미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이 산티아고 길에서! 당나귀가 불쌍하다고 울고 있다. 그런 세미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이게 무슨! 아까는 바람 소리와 함께 까르르 소리 지르며 웃다가 지금은 햇빛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다시 크게 웃었다. 웃고 울고 다시 웃는 우리를 보면 누군가 외칠지 모르겠다. "결박하라!"
300여 미터 앞에 노천카페가 있었다. 이동식으로 꾸며진 야외 카페였다.
“여기서 커피 마시자!”
얼마 만에 만나게 되는 사람 흔적인지! 날씨가 변화무쌍한 날,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12킬로 구간 중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각오하고 걸었지만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이야! 그래서인지, 이곳 카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잠시 쉬었다가 가는 포인트였다. 우리도 조금 마시고, 이제 일어나야지 싶을 때였다. 아까 지나쳐왔던 당나귀 녀석이 느릿느릿 이쪽 카페로 걸어오고 있었다. 녀석이 여기에서 쉬다가 가는 것인지! 저 짐들은 어쩐단 말인가. 동키는 원래 당나귀가 짐을 실어주는 데에서 유래되었지만 지금은 택시로 짐을 옮겨준다. 옛날 식으로 짐을 옮기는 이유가 뭘까? 지루하고 힘든 길에서 짐을 싣고 느리게 오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한참 만에 녀석이 카페 입구에 당도했다. 우리는 이제 막 배낭을 메고 나서던 참이고, 녀석은 카페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세미가 자기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달라고 했다. 배낭을 열고 어쩌고 하는데 번거로웠다. 오히려 내 배낭에서 간식을 꺼내는 게 쉬웠다. 배낭 밖으로 비닐봉지를 매달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슈퍼에서 샀던 사과가 생각났다.
“내 사과가 주자!”
세미가 가볍게 비닐봉지를 열어서 사과 한 알을 꺼냈다. 당나귀 주인장에게 사과를 먹여도 되는지 물었다. 그가 괜찮다고 허락했다. 사과 한 알을 녀석의 입에 넣어줬더니 우걱우걱 잘도 씹어 먹었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도, 길 위에 오고 가던 사람들도 당나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카페 주인장이 당나귀 주인한테 뭐라고 소리 지르는데, 아무래도 혼내는 것 같았다. 스페인 말이지만 뉘앙스가 느껴졌다. 카페 앞에서 그러고 있다고 혼낼리는 없고, 뭐지? 아무래도 내 느낌적인 해석으로는 이랬다.
‘당나귀 먹을 걸 왜 순례자들한테 얻어! 네가 구해줘야지! 순례자들한테 사과 한 알도 소중한 거 몰라? 여기 와서 당나귀 간식은 먹이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서 당나귀에게 간식 같은 걸 건네주는 모습이었다. 희한했다. 어째 언어를 몰라도 알아듣는 것 같지?
이제 갈 길 가려는데, 이상했다. 짐이 가벼웠다. 내 배낭에서 사과 한 알만 꺼내 준 것인데, 어째 무게가 안 느껴진다.
“세미, 나 이상해! 배낭이 너무 가벼워. 사과 한 알 꺼냈다고 이렇게 가벼울 리가?”
내가 제자리에서 발을 통통 뛰면서 배낭을 흔들었다.
“오? 정말이야?”
우린 서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가벼워졌나 봐!”
“그래, 그거야!”
다시 애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우리 곁에 누구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이런 질주를 막았을 것인가? 아니면 그도 우리처럼 똑같이 변해갔으려나! 아니, 멀찍이 떨어졌을 것이다. 얼마 동안 가벼운 마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나게 뛰다시피 걸었다.
기회의 폭
로스 알코스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 가게에서 누군가 앉아서 아는 척을 한다. 보니, 파리에서 만났던 한국인 청년들이었다. 같은 시기에 들어오는 사람들끼리 파리에서 얼굴이나 한 번 보자며 채팅창이 만들어졌다. 파리에서 만났을 때 어쩌다 보니,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술도 못 먹는 탓에 그들과 간단히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 그 뒤로도 그들은 계속 함께 여행 중이었나 보다. 젊다는 이유로 부담 없는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젊은 친구들이 왜 여태껏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다닐까 싶었다. 패기에 찬 청년들이 혼자 길을 나서는 것을 두려워할 것 같진 않고, 서로 마음이 맞았나 싶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너무 좁힌 것은 아닌가? 뭉쳐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잘 다가가지 않았다.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다른 환경에서 얻는 생소함 속 즐거움도 있을 텐데 말이다. 여행자로서, 순례자로서, 더 풍성한 만남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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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좋아요>
로스 아르꼬스(Los Arcos)
덤불과 로즈메리, 침엽수가 있는 언덕 마을이다. 조그만 농업 도시로, 옛날부터 까스띠야와 나바라 왕국의 국경에 위치했다. 로마 시대 마을이 남아 있던 곳에 로스 아르꼬스를 건설했는데 왕이 백성을 치하해 활 그림을 하사하면서 마을 이름이 아르꼬스(Arcos; 활 모양의)라고 불렸다.
그 후 상인이나 환전상 등 유대인이 많이 살았는데, 2, 3층 석재와 벽돌로 만든 집에는 발코니와 문장, 난간이 있었다고 한다.
로스 아르꼬스는 독립전쟁까지 수많은 군대가 지나간 곳이다. 이곳을 두고 '에스떼야와 관계가 안 좋다, 오드론 강 물은 마시면 안 된다'라고 쓰인 책도 있고, 1592년에는 이곳을 “포도주, 빵, 과일, 사냥, 전투, 상업의 땅”이라고 묘사한 사람도 있었다.
-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
날라리의 하루 일과
로스 알꼬스에 도착했다. 원래 일정표 대로라면 어제 도착했어야 했다. 남들 걸었던 거리의 반에 머물러 놓고, 오늘도 역시 12킬로만 걷고 끝냈다. 하루 쉰 것도 아닌데, 반 타작만 하니 차이가 났다. 그런데 좋았다. 일정은 더뎌지더라도,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해서 침대를 고르는 행운도 있고, 마을도 구경할 수 있으니! 이번에 간 알베르게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부지런한 한국 청년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지만 방이 달랐다. 조용히 눈인사만 하고 조용히 지나쳐왔다.
샤워하고 햇빛이 널린 마당에서 빨래를 널었다. 조용히 동네를 돌면서 오후의 느긋함도 누렸다. 늦을 때는 샤워하고 빨래하면 저녁 먹으러 가면 끝이었다. 성당은 물론 동네 한 바퀴 돌기가 어려웠다. 슈퍼에서 간식이라도 사면 다행이지만 멀면 그것도 먼 나라 얘기다. 운 좋은 날에는 성당에 가서 미사도 드리곤 했지만, 마을마다 상황이 달랐다. 또한 미사가 있어도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라 성당을 구경하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이야 순례길에 미사가 우선이겠지만, 나는 날라리니까!
어차피 우리가 걸을 길은
성당 앞에 카페 광장이 있었다. 오후 그늘진 자리부터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말로만 듣던 타파스를 시켜봤다. 새우에 버섯에 버터 바른 바게트! 꼬치에 꽂아 나온 타파스는 정말 맛있었다. 이 지역이 타파스로 유명한 줄 나중에 알았다. 더불어 로그로뇨에 가면 끝내주는 타파스가 많다는 말들을 했다. 일정표대로 하면 내일 도착할 곳이지만, 20킬로도 버거운 우리에게 내일 일정은 28킬로! 보통 사람들도 무리해서 가야 하는 거리였다. 우리는 고민 없이 중간 마을에서 하루 쉬자고 했다. 내일부터 삼 일간 계속 28킬로 걷게 되어 있었다. 더러는 이제 익숙해져서 20킬로 걷던 사람들도 30킬로씩 걸어도 될 거라는데, 아직은 무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건 일반 사람, 보통 걸음을 걷는 사람들 얘기다. 나나 세미처럼 달팽이 류들은 애초에 이 거리만큼 하루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는 기이한 운명에 처하는 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다 먹자고 하는 짓?
타파스에 맥주 한 잔 마시면 참 좋겠는데, 한 잔을 못 마시니 안타까웠다. 땀 흘리고 마시는 맥주가 얼마나 맛있는지 나도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술을 마시면 숙취가 깨지 않았다. 가족들 모두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 젊을 때나 어울리며 마시는 게 술이라는 인식이었다. 즐기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모여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대신 탄산음료나 주스로 만족해야 했다. 타파스는 그 종류가 다양했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큰 도시에 가면 어떤 음식을 맛보게, 그 음식점은 꼭 가보게, 타파스가 맛있네, 중국 뷔페는 어디에 있네, 라면을 사려면 어떻게 가야 하네, 같은 얘기들이 오갔다. 여행자들은 원래 먹고 자는 얘기들을 굉장히 진지하게 한다. 길 위에서 철학적 물음, 인생의 덧없음, 뭐 울고 불고, 지나간 악연을 죽여 살려, 고마웠던 사람들 떠올리며 눈물 뿜다가도, 힘을 내며 걷는 동력을 먹을 것에서 얻는다. 앗싸! 빨리 가서 먹어야지! 길 위의 순례자들에게 먹고 자는 건 중요하니까!
지켜보며 공부할 일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좀 쉴까 하다가 바로 코 앞에 있는 성당을 기웃거렸다.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인 여성! 그녀는 내게도 있는 까미노 어플로 많은 정보를 얻었단다. 나는 작동이 잘 안 된다고 하자, 자기도 이것저것 눌러서 됐다 한다. 내가 할 때는 구동 안되던 것이 그녀가 해보라니까 됐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한눈에 담았다. 여행 중에 만난 일본 사람들은 대개 친절했다. 일본 경제가 망가진 뒤로 눈에 띄게 일본 여행자들이 줄었다. 동남아, 인도, 어디든 동양에서는 개척자 노릇을 하던 일본인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배낭여행 가이드북을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뚫어놓은 루트대로 많은 이들이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섬나라 사람들의 욕망은 여행에서도 뿜어져 나왔다. 이국을 동경하던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 콘텐츠 안에 그 꿈을 심어 놓는다. 정서적으로 일본을 용서하긴 어려워도, 자국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일본인들을 지켜볼 때는 답답할 때가 많다. 어디서나 소수 지배 계급들은 다수 대중들을 쥐고 흔들어왔다. 광란의 질주에 동참한 인간들은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우선 알아야 정리가 되지 않을까? 우리도 지금의 역사부터 잘 정리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의 역사는 바로 잘 세워졌는가? 아직도 남은 숙제들이 많지만 세월이 가니 아득해져 간다. 더는 미루면 안 될 역사들인데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섬 아닌 섬에 갇혀서 살게 되었다. 고립의 정서가 생겼다. 외국은 무조건 비행기나 배를 타고 나가야만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분단 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갔던 이야기가 단군 신화 이야기처럼 현실감 없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통일을 염원한 아이가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간다. 북녘땅에 굳이 가볼 이유가 없더라도 가고 싶은 땅을 물리적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개발이 덜 된 땅에는 여전히 우리 조상들의 정서가 남아있으려나? 기차를 타고 유유히 국경을 지나면 바깥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가 좀 더 확장된 활동무대에 놓인다면 우리의 정서도 더 깊어질지 모르겠다.
<알아두면 좋아요>
산따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팔각형의 이 탑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가장 높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탑 중 하나이다.
성당의 내부를 장식한 벽화들은 부르고스 출신의 끄리스또발 곤살레스의 작품인데, 꼬르도바 가죽 가공을 차용하여 나무와 은 위에 벽화를 그렸다. 1561년에 만들어진 바로크 장식이 아름다운 합창대의 각석과 그 아래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회랑은 저녁 미사를 마친 순례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한다.
산따 마리아 성당 복도에 성모상이 있다. 그늘에 모셔진 이 성모상은 일 년에 한 번, 6월 15일에 햇빛에 놓인다.
-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
이것은 황금사원?
성당 문이 열렸다. 오늘은 미사를 드리고 가자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이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면 은혜로울 듯했다. 그런데 미사가 없단다. 그냥 성당 개방 시간이었다. 아마도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을 위해서 입장시켜주는 것 같았다. 미사를 드리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건 황금 사원이다. 삼 면이 모두 황금색이었다. 여태껏 이렇게 황금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당은 처음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지만 눈으로 보는 그 압도감을 담을 수 없었다. 황홀경으로 성당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실 이건 은이란다.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보이는 듯 하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로움이 느껴진다. 세미는 한 번 둘러보더니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기도인지 멍 때리기인지, 앉아있다가 밥때가 되어서 일어났다. 일본 여성은 아직 성당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자신은 좀 더 있다가 가겠노라고 했다. 세미가 성당으로 다시 들어와서 내게 순례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도장을 쾅 찍고 시익 웃었다. 이제 정말 고대하고 고대하던 밥시간이다.
샹그릴라,
그 도달할 수 없는!
코 앞에 있는 식당, 여러 카페와 식당이 공유한 야외 테이블이다. 벌써 몰린 사람들로 자리가 없었다. 아까 젊은 한국 여성들이 먹고 있는 메뉴가 뭔지 물어봤다. 친절하게 알려준 그 메뉴를 똑같이 시켰다. 일단 고기 스테이크였다. 주문을 마치고, 어디서 먹나 하다가 대충 성당 앞 구석에 앉아서 먹어야지 싶을 때, 중년의 한국인 커플이 손을 들어 보였다. 자리가 없으면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도 좋다는 것이다.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막간에도 둘러봤지만, 자리가 없었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식사와 함께 ‘샹글리아’라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들이 먹고 있는 메뉴도 맛 보라며 내밀었다. 나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 같은 술이다. 이들 부부는 어쩐지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퇴직하고 떠나온 여행이란다. 남자 나이가 벌써? 퇴직할 나이로 안 보였다.
"희망퇴직을 했어요. 결혼할 때 세계 여행 가기로 했거든요. 지금 꿈을 이루는 중이에요."
이보다 더 부러울 수는 없다. 이들은 나이를 먹고 만났다고 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가서 사업을 할 거란다. 이들의 이야기로 식사 자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리처럼 무리하지 않으며 걷는 이들이었다. 이후 약속을 하지 않아도 계속 만남이 겹쳤다. 부지런하고 잘 걷지만, 조금씩 걸어서 마을에서 즐기는 타입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맛있는 식사도 마치고 동네 슈퍼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왔다. 앞마당에 자판기가 있고, 나무 의자도 놓여 있었다. 사람 없는 마당에서 조금 쉬다가 들어가기로 했다. 나무 의자에 벌러덩 누워 있는데, 숙소에서 나온 한국 여성이 자판기에 돈을 넣고 물을 눌렀다. 기계 소리가 분명 났는데, 텅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질 않았다. 보니, 물병이 나오다가 끼어 있었다. 돈만 먹은 것이다. 주인장도 없는 밤이었다. 그녀는 포기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우리와 다른 방이었다. 세미와 내일 일정을 얘기하는 사이, 주인장이 뭐 때문인지 나타났다. 나는 오지랖을 펼쳤다. 그에게 물병이 끼었다고 말하고, 그녀를 찾았다. 하필 그 방에 한국 여인들이 몰려 있었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서 물었다.
“물병 끼이신 분?”
딱히 비싸지도 않은 물인데, 내가 왜 그리 호들갑을 떨었는지! 그녀는 주인장이 꺼내 준 물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뻘쭘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물을 건네받고 웃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들어가서 자야지!’
너의 결핍이 보여!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에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건너 침대에 앉은 여인은 아까도 그러더니, 또 자기 담요를 방 안에서 털어댔다. 사람들 얼굴 가까이에 대고! 유럽인들이 매너 좋고 정중하고 뭐 그럴 거라는 환상이 순례길에서 많이 깨졌다. 발꼬랑 내 나는 양말을 사람 코앞에 걸어두질 않나, 사람 보는 앞에서 팬티를 갈아입지 않나! 시끄럽게 떠들거나 불빛을 얼굴에 비추는 일은 보통이었다. 그러더라도 누구 하나 제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순례길 예의처럼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동양인을 은근히 무시하는 유럽 노인네들도 있었다. 한 30대 여성은 그런 노인과 맞짱 뜨려다가 포기했다. 각국에서 왔지만, 우월의식으로 뭉친 인간들이 섞여 오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의 결핍에 놓인 이들은 그렇게 남을 깎아내리는 걸로 푼다. 인종 차별은 바다 건너 남의 얘기로 생각했다. 잠깐 여행하는 거야 한국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살기 좋은 곳에서 사는 애들까지 굳이 걱정할 필요가 있겠나 싶을 수 있다. 나 역시 관심을 뻗지 않았지만 그 따돌림의 시선들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그런 힘든 시간들을 어찌 견디었는지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차별이나 따돌림 같은 문제는 외국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칫하면 뭉치면서 잔인해질 수 있다. 성향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뭉쳐서 힘을 과시하는 때가 있다. 고립된 사람 편을 들어주면 그 사람마저 짓누를 때가 있다. 나서는 일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 쉽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사람만 친구가 되어줘도 고립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
밤이 되자 불이 꺼졌다. 모두 기절하듯 잠든 밤, 오늘은 코 고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피곤하면 골게 괴는 코지만 지나치게 코 고는 사람이 없는 건 숙면에 도움이 된다. 남들보다 반만 걸었어도 피로도는 갑이다. 불면증 없는 순례길의 밤은 깊고도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