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 Mar 22. 2022

봄비

그리고 운동화

지독히도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매일 아침 어김없이 쏟아지는 할머니의 욕바가지를 뒤집어쓰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이 눔의 지지배가 밤새 잠도 안 자고 설치더니 해가 중천인데 여적지 자빠져있냐!’는 할머니의 호통이 그저 기상나팔이려니 여기는 건 일상이고 늦잠으로 아침밥은 꿈도 못 꾸지만 비가 오는 날마다 운동화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들고는 낡은 운동화를 신은채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 시절 시골의 거의 모든 도로가 비포장이긴 했지만 버스가 다니는 큰길은 뭔가 단단하고 물웅덩이도 없었는데 경운기가 겨우 지나갈만한 작은 시골 길들은 거의 진흙길이었다. 가뜩이나 흙먼지 풀풀 날리는 울퉁불퉁한 그 길에 비가 오면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여 피해 다녀야 했으며 길의 가장자리는 조금 덜했지만 비에 젖은 무성한 잡풀 때문에 옷자락에 흙탕물이 묻어나서 할 수 없이 물컹한 진흙을 밟으며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신을 깨끗한 운동화를 따로 챙겨 들고 다닐 수 밖어 없었다.


조금 번거로웠고 유난을 떤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삼키면서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비 오는 날이면 버스표를 파는 구방 슈퍼할머니네 마루 밑에 진흙 범벅이 된 운동화를 구겨 넣으며 만족스러운 맘으로 깨끗한 운동화로 갈아 신고서 버스를 타곤 했다.


하지만 단연코 가장 최악의 날들은 여름의 지긋 지긋지긋했던 장마도 아닌 바로 비가 내리는 봄날이었다.


얼었던 땅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시골의 진흙땅은 잔뜩 습기를 머금어 기분 나쁘게 질척거렸으며 자칫 덜 녹은 곳을 밟았다간 미끄러질 수도 있어서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야만 했다. 감수성이 넘치게 충만했고 시인을 꿈꾸던 사춘기 열정 담아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두꺼운 스프링노트에 유치한 글을 매일 끄적거리던 나였지만 그런 날만큼은 아지랑이 피어나는 아스라한 들판도 가슴설레게 솟아나던 초록의 새싹들도 생각할 수 없었다. 녹아내리는 진흙땅에 봄비가 젖어 들어 물컹대며 푹푹 빠지는 그 길은 암울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런 날엔 버스를 놓칠 작정으로 천천히 걸었다. 당연히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학생주임 선생님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를 들으며 벌을 서야 할 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운동화를 갈아신으며 생각했다.


제발 봄비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그리고 수도 없이 기도했다.


땅이 다 녹을 때까지만 이라도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아는 모든 신께...

작가의 이전글 C도로의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