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관문을 열면서 나에게 남은 에너지가 양말 벗을 만큼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겨우 양말을 벗고 드러눕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소란스럽던 집이 가라앉고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는 나의 몫을 깨닫는다. 외투와 모자가 롱다리 귀신처럼 보이는 행어와 눈싸움을 하는 시간. 씽씽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씽씽카 바귀 자국이 엉덩이에 두 줄로 선명하게 찍혀 혼나고는 했다. 부드러운 경사면은 이제 없다. 다만 멀쩡하던 정신이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고꾸라지는 것 같은 감각만 있다. 화들짝 놀라 돌부리 붙잡듯 몸에 힘을 줘서 결국 다시 잠이 깬다.
누군가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다리를 접고 앉아야만 한다는 생각. 커피컵 안의 온도와 밖의 온도 차이가 크면 벽면에 이슬이 생긴다는 생각. 나의 존재와 가까운 이야기일수록 핵노잼이라는 생각.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실천하는 개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드는 물풍선같은 생각들. 터지기 쉽고 미끄러운.
#2.
잔디가 있다. 한 번도 고된 삶을 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푸른 잔디. 석양을 받아야 겨우 빛이 바랠 뿐 다시 아침이 되면 쨍한 더운 녹색으로 빛나는. 잔디를 밟지 마세요 푯말을 찾아보지만 없다. 사람들은 잔디 위에 드러누워 공간을 보낸다.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명품 쇼핑백을 맨 할머니가 빠-동, 하고 지나간다. 해링본 셋업을 입고 부츠를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