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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an 13. 2023

<메모리아(Memoria)>, 2021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메모리아>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제게 <메모리아>는 경탄스러운 것 이상으로 아쉬운 영화입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영화의 핵심 문제로 설정한 타자성 때문인데요, 이 지점에 대해 짧게 말해보겠습니다.


<메모리아>를 비롯, 소리를 주요 질료로 삼은 근 몇 년 간의 작업들에서 아피찻퐁은 (지난 작업들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문제로 설정하고 있어요; '소리에 대한 감각만으로도 서로 상관하지 않는 세계들을 껴안을 수 있을까?' 즉 우리와 같은 평면을 살아가고 있지만 만날 일이 없는 절대적인 타자 혹은 사건을 '울림'만으로 지각하고 조우할 방법이 영상의 체계에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를 그는 궁리하고 있는 겁니다.


이를 실험해보기 위해 아피찻퐁은 (소리의 합성과 중단으로 픽션적 상태를 형성하려 하는) 이른바 '사운드 아트'의 방법론을 끌어들여 이를 중심으로 몽타주를 조직하는데요, 이게 시네마토그라프 모델의 보편적인 방식을 돌파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메모리아>는 (제 친애하는 동료이자 스승인 배세진 선생의 말을 맘대로 가져다 쓰자면,) '영화의 타자'와 '타자의 영화' 양자를 한 큐에 엮으려는 대범한 시도이고자 해요. 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시도이고자 하는 데서 <메모리아>는 그칩니다.


두번째 에르난과 함께하는 영화의 후반부를 떠올려볼까요? 첫번째 에르난이 DAW로 소리를 직접 믹싱하고 또 그걸 시각화한 이미지를 제시해서 '쿵' 소리로 대표되는 제시카의 내재적인 경험 -저는 벤야민의 Erfahrung을 떠올리며 말하는 중입니다- 을 재구성하고자 했다면, 두번째 에르난은 기억을 주고 받는 범속한 말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마치 정신과 상담을 하는 것처럼요. 이건 물론 그가 모든 걸 기억하는 "하드디스크"적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래서 막판에 제시카가 '나'를 주어로 회상을 중얼거릴 때, 그런데 그것이 에르난의 것이면서 에르난의 전생의 것일 때, 그리고 제시카가 사라진 이후 에르난이 (‘쿵’ 소리를 들은 것 마냥) 머리를 움켜쥘 때, 이는 두 번째 에르난이 첫 번째 에르난과는 달리 경험의 재구성에 성공했다는 걸 공유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이 영화의 아쉬운, 아니 나아가 위험한 지점이에요. <메모리아>의 단점은 경험의 재구성이 공유의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다른 세계들을 껴안을 수 있는 건 서로의 경험(들)이 정확히 같아질 때 뿐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엉클 분미> 때도 그랬지만,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거나 이걸 직접 모티프로 삼을 때 아피찻퐁의 작업은 의심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메모리아>는 <엉클 분미>보다 훨씬 심해요. 두 번째 에르난이 등장할 때엔 누구라도 보르헤스의 저 아름다운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떠올릴 겁니다. 여기에도 모든 걸 기억하는 인간이 등장하죠. 하지만 <메모리아>와 <푸네스>는 기본 설정만 유사할 뿐, 자세히 따라가보면 서로에 대한 반대항으로 성립되거든요? 보르헤스는 푸네스를 부정적인 존재로 봅니다. 모든 순간을 각각의 대상으로 '정확히' 인식해버리기에, 그는 상이한 사물들 사이에 매듭을 엮거나 풀어내는 것으로서의 '생각'을 할 수 없는 거죠.


반면 두 번째 에르난은 어떻던가요? 그는 나름 선택적으로 기억을 ‘생각’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의 말과는 달리 기억에 의한 고통도 별로 겪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평온한 신선 같은 느낌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째 에르난 덕분에 덕분에 제시카는 경험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아피찻퐁은 두 번째 에르난을 긍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어요. 이는 아피찻퐁의 실제 발언과도 연관이 있는데, 그는 만약 모든 인간이 전생을 기억한다면 영화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고 희망찬 어조로 말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피찻퐁은 정말로 영화가 사라지는 걸 하나의 이상으로 삼는 겁니다. 네, 가설이 아니라 이상 말이죠.


그런데 그건 타자성 내지는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영화를 비롯한 픽션들을 일종의 대체 커뮤니케이션 장치로 여긴다면, 이런 이상은 타자와의 소통에 얽힌 '(불)가능성' 전부를 죄악으로 취급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테니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세상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두고 A가 '저 사람은 슬퍼보여'라고 말하고 B가 '저 사람은 즐거워보여'라고 말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범사회적인 비난을 받을 겁니다. <메모리아>에서 아피찻퐁은 타자성을 온전히 타자성으로 긍정하는 대신, 공유의 형태로써 ‘가능한’ 동일성에 용해하고자 하는 거에요. 그래야만 경험을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거죠. 예전에 흔히 쓰이던 ‘무균실’의 비유가 이쯤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메모리아>와 많은 걸 공유하는 작품은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MCU의 <로키>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일 겁니다. '나'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오직 또 다른 '나' 뿐이리라고 긍정의 어투로 속삭인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반동적인 순수주의는 '여성'을 규정할 조건을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된 작금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어요.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포기랄까요? 아피찻퐁은 자신이 손에 쥔 것들을 제대로 쓰는 데에 크게 실패했습니다. 픽션이 픽션 스스로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우스꽝스러운 모순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죠.




+

* 내가 운영하는 익명창인 페잉에 <메모리아>에 대한 질문 하나가 들어왔다. 답변을 하려고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생각의 가지가 마구 뻗어나가서, 그 결과 약간 길어진 답변을 리뷰에 이어 추가로 게재한다. 음슴체와 평어체는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이상한' 지점을 짚어준 것 같은데... 일단 어떤 의미의 구성에는 그 의미에 부합하는 제작 과정이 꼭 따라와야 한다는 건 지나친 순수주의나 일그러진 '작가주의'로 엇나갈 수 있는 논리긴 해. 물론 우리 앞엔 <아바타: 물의 길>처럼 얼핏봐도 모순인 사례가 있고, 그와 반대로 스타리움 공연을 포기한 콜드플레이나, 동시녹음과 로케이션 촬영에 집착한 스트라우브-위예처럼 작업/활동(Work)을 할 수도 있지만, 메세지와 제작 과정이 반드시 일치해야만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봉준호가 <옥자> 제작 이후에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옥자> 전체가 기각될 텍스트가 되는 건 아니듯이! 근데 이게 <메모리아>의 경우에는 좀 필요한 의문일 수 있는 듯 해서, 약간 에두르는 답변을 해보겠음.


나는 쿵 소리가 (곧 공개될 카페크리틱 메모리아 특집에서도 말했는데) 경험의 은유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경험이 된다고 했지. 영화의 두 번째 씬에서도 보여지듯 이 영화는 쿵 소리를 제시카 내면의 고통으로만 만들지 않음. 고통이 아니란 게 아니라, 고통으로만 귀결되게 하지 않았다는 거지. 이 '울림'이 전적으로 내면의 것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쿵 소리의 다중적인 위상이 이 영화가 근사해질 수 있었던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이 맥락에서도 아피찻퐁은 자기가 손에 쥔 걸 충분히 못 썼음. UFO가 등장하면서 "동시에"라는 부사를 빼버리고 제시카를 '어쩌다보니 외부의 소리를 잘 잡을 수 있던 안테나' 정도로 격하시키는 거지. 즉 UFO는 영화의 느슨한 듯 기이한 타임라인 ―가령 제시카는 '영안실 비슷한 곳'에 과연 몇 번이나 들어갔을까?― 을 정리할 확고한 시제(Tense)의 도래를 끝까지 저지하는 제스쳐이지만 한편 유운성 평론가께서 지적하셨듯 소리의 이중성을 폐지하는 제스쳐이기도 함.


하여튼 그래서... 영화라는 픽션적 '매체' 자체가 경험의 유일성을 오염시키고 번지게 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사실이야. 인물의 주관을 고스란히 육화하면서 관객이 그 주관적 입장을 어느 정도 향유하거나 반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스탠리 카벨 식으로 말하자면 '시민적 삶에의 항체'를 만들 역량이 영화를 비롯한 픽션적 '매체'들에 있는 거고, 그 중에서도 영화는 인물의 주관성과 상황의 객관성이 서로에 대해 아주 평범한 표면에서 뒤섞이고 쟁투하는 탈중심성의 '매체'임. 이미 무성영화 시철부터 말이야. 앞서 쿵 소리의 다중적인 위상을 논했던 것처럼, 아마 <메모리아>에서 아피찻퐁은 그걸 분명 인지하고 있었고. 근데 이게 처음에 말한 '이상한' 지점이야. 제시카가 듣는 첫 번째 에르난의 음악을 우리한테 안 들려주는 걸 떠올려볼까? 이 장면은 첫 번째 에르난이 소통을 통해 제시카에게서 (데리다-아즈마의 의미에서) '오배송' 받은 '경험'을 재구성한 걸 또 자기 방식으로 제시카에게 '오배송'하는 건데, 그 결과를 영화는 우리에게 공유하지 않잖아.


여기서 나는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됨. 앞서 거론한 <메모리아>의 특수한 소리 연출들과 비슷한 걸 이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거든. 가령 카페에서 드니즈가 '이 음악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라고 질문하자 대답하지 못하는 점원이라던가, 폴이 드니즈에게 '꼭 할 말이 있어, 그건...'이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등장해서 모든 소리를 잡아먹어버리는 맹렬한 기차 소음이라던가. 한데 고다르는 아피찻퐁과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지.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보자면, 고다르는 여기서 경험의 유일성을 논하는 게 아니라 경험의 '오배송' 가능성, 즉 소통에 내재된 온갖 위험을 '언어'에 있어 한껏 열어두려는 시도를 한 것 같지. 그럼에도 존재는 소통과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게 고다르의 '문제적'인 긍정이고. 반면 리뷰에 썼듯 <메모리아>에서 아피찻퐁은 결과적으로 경험의 완벽한 공유를 말해버리잖아? 근데 이 "결과적으로"라는 단서가 중요함.


아피찻퐁은 이번에 '둘로 나뉜 영화'를 다시 만들어버린 건데, 어떤 방식이냐면 첫 번째 에르난이 사라지는 걸 기점으로 하는 전반부와 후반부임. 후반부가 지나치게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면 전반부는, 적어도 소리에 있어선 잠시라도 선제적인 탈신비화가 이뤄지고 있지. 눈치챘겠지만 나는 <메모리아>의 리뷰에서 거의 후반부만 도마 위에 올려놨는데, 왜냐하면 전반부는 앞서 거론한 성질들, '경험의 유일성을 오염시키고 번지게 할 수 있는 매체'니 '소통에 내재된 위험'이니 하는 것들이 분명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게 <메모리아>가 아쉬운 결정적인 이유지. 이 '둘로 나뉜 영화'는 <열대병>이나 <징후와 세기> 때처럼 서로 비슷하면서 다른 세계들이 "항구적인 반향"(홍상수)에 빠지는 작품이 아니라 전적으로 서로의 반대항이라 "항구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없는 작품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의 결말을 근거로 전반부까지 포괄해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거임. 아무리 전반부가 근사하고 크리티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내 생각에 <메모리아>에는 두 명의 아피찻퐁이 함께 뚜렷이 영화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하나는 (전생을 포함한 다른 타임라인을 기억하는 식으로) 초월을 향하고 싶어하는 아피찻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존재를 포함한 '자연'을 끌어안는 식으로) 초월을 세속화하려는 아피찻퐁임. 이 둘이 적당히 다툴 때 아피찻퐁은 걸작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둘이 다투지 않고 각각의 파트로 떨어진 채 전면화된 것 같아. 답변을 하다보니 그게 <메모리아>의 패착이라고 생각이 정리되었어. 이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함. 그래서 한 줄로 요약하면, 익명이 말한 <메모리아>의 "모순적인 지점"은 사실 프로덕션-포스트 프로덕션의 문제가 아닌 영화 내적인 문제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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