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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Feb 05. 2023

양선형의 『말과 꿈』에 해설을 실었음


자음과 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16번째 책으로 기획된 양선형의 소설집『말과 꿈』에「틈새의 시간, 되찾은 현재」라는 제목의 해설을 썼다. 원래 양선형의 소설을 좋아했던지라 청탁이 오자마자 수락했으며,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너무 즐겁게 쓴 나머지 생각의 정리정돈이 덜 된 느낌은 있지만 말이다. (군데군데 내 문장 치고도 어색하게 읽히는 문장들이 있을 텐데, 이는 교정 과정에서 너무 늦게 발견한 오류다) 나는 여기서 (양선형의 지난 소설집 두 편에 각각 해설을 썼던) 강동호와 강보원의 '강력한' 독해와 조금 다른 궤로 양선형의 작업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 키워드는 '시간'이다. 물론 이는 『말과 꿈』에 수록된 작품들 자체가 지금까지의 양선형의 방법론을 심화하는 한편 그로부터 단절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품들이 이렇게 묶인 건 양선형의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렵다'는 흔한 (그리고 사실은 당연한) 평을 넘어섰을지라도 '폐쇄적'이라거나 '주절거린다'거나 하는 판단에 치부되곤 하지만, 오히려 양선형의 소설은 그런 판단들을 내파시키는 독창적인 시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증명하고 또 알리고자 했다. 아래는 알라딘의 링크이다. 






"적어도 남한에서 양선형처럼 ‘카르페 디엠’이란 구호에 어울리는 소설가는 없다. 당연하지만 이 말에는 어떤 조롱이나 우회의 뉘앙스도 없다. 정말 그렇다. 요즈음엔 ‘카르페 디엠’이 ‘YOLO’에 자리를 내준 낡은 말이 되었어도 그렇다. 다만 양선형이 이 구호를 유행시킨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는지 안 봤는지는 이런 생각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의 소설과 상관이 있는 건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이 구호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말기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지은 송가의 한 구절, "현재를 잡아라, 내일은 가급적 믿지 말고(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양선형은 앙투안 볼로딘과 다르다. 독자의 현실감각을 최대한으로 압박하려는 소설을 양선형은 아마 쓰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양선형의 소설에 흔히 붙는 '실험적'이란 관형사는 사실 그의 소설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는 초현실, 환상, 망상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따라가면서 실험하는 존재이며, 소설을, 예술을, 글쓰기를 실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글쓰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험됨을 감당하는 존재” 라는 강동호의 근사한 독해에 흠을 잡을 생각은 없지만, 그런 측면에서 양선형은 (주어진 질료를 생경한 조건에 배치한다는 의미에서) 실험적인 동시에 (손상된 조건을 주어진 질료로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補修的)이기도 하기에 그의 설명은 절반의 진술로 그친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보수적이란 말인가? 개념으로서 ‘시간’이 그것이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모종의 속임수다. 그것도 ‘자연적’인 속임수. 카를로 로벨리는 이런 형이상학적 사변이 지난 세기 이래의 물리학적 탐구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현대 물리학의 성과 중 하나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라고 로벨리는 말한다). 현재는 오직 과거와 미래를 직간접적으로 호명할 때에만 간신히 또 일시적으로 성립되는, 미스터리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시간이다. 로벨리 말마따나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단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면, 그래서 베르그송 말마따나 현재야 말로 시간의 집합이라면, 사실 현재란 과거와 미래를 비롯한 수많은 시간대가 혼란스럽게 순환하고 뒤섞이고 있는 시간대일 테다. 다시 한 번, 잠정적이고 불순한 시간으로서의 현재."


"(포스트-)칸트 식으로 말해보자. 자기의 인식과 자기 밖의 세계 사이의 완전한 합치는 당연히 불가능하나, 그런 경우에도 이미 나와 세계는 지각의 층위에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에 연관되어 있다. 즉 한계는 모든 가능성을 무(無)로 돌려놓는 대신 자기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버스의 창문이 차창 밖의 풍경을 안전하게 보여주면서 우리의 모습을 약간 비추기도 하고 그 자체도 구경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양선형의 경우라면 초월적 인식 주체의 실패를 증언하면서, 그 실패 자체가 행위가 되고 관계를 창출하는 순간을 쓴다. 앞선 구절의 내용은 상상과 회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상상과 회상을 현재의 일부로 삼아 그 가면을 더듬거리는 광경인 것이다. 양선형의 주체들의 행위성은 오직 한계에서 찾아야한다. 오늘날 낡고 흔한 수사가 된 '(불)가능성'은 바로 이런 식으로 갱생한다."






작가의 이전글 <메모리아(Memoria)>,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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