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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Feb 07. 2023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이란 책을 만들었어요


영화 비평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함께 영화비평집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을 제작했다.


홍은화, 조일남, 이보라, 박동수, 윤아랑 다섯 명이 지난 한 해 동안 팟캐스트 녹음을 위해 쓴 영화 리뷰 중 세 편과 각자의 에세이를 묶은 짧은 책으로, '작은 기념비'의 성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그치지 않는 게 분명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팟캐스트를 들어본 분들도, 듣지 않은 분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낮은 문턱의 책이니 읽기 전의 걱정은 덜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영화평론가들이 협업의 와중에 서로(의 작업)를 어떻게 의식하는 지를 글 안에서 감지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재미의 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나는 책에 (이전에 여기 브런치에 게재한 바 있는, 하지만 적잖이 손을 댄) <소설가의 영화>, <프랑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리뷰와 「강박적 타자를 위한 스케치」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실었으며, 이 중 마지막의 「강박적 타자를 위한 스케치」는 내가 동시대 영화 속의 '주체성'에 대하여 한 동안 갖고 있던 가설을 (<이창>, <우연과 상상>, <헤어질 결심>, <아네트> 등을 경유해) 러프하게 풀어놓은 비평적 에세이이다. 정말 러프한 스케치인 만큼, 읽고 난 후 과격하게 피드백을 남겨주신다면 무척 감사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재밌게 읽어달라는 말은 역시나 하지 못할 것 같다. 대신 재밌게 읽히면 좋겠다, 라고만 말해본다. 아래는 책의 제작을 위한 텀블벅 링크이다.






"얼마 전 한 친구에게서 ‘당신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안과 밖’을 문제로 설정해왔네요?’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작업의 한 방향을 비로소 깨달았죠. 어떤 면에서 저는 근 3년 동안 ‘안과 밖’이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복’시켜온 것 같아요. 다만 좀 더 명확히 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 자체에 대해선 저는 큰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정반대죠. ‘안과 밖’이라는 구분이 성립될 때가 정말로 제 관심을 끕니다. 존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분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요구 및 성립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 이게 비평가로서 저의 이상 중 하나입니다."


"<소설가의 영화>가 특별한 건 시간적/공간적 부정교합 없이, 오로지 과거과 미래를 다루는 말만으로 감각의 교란이 발생할 수 있는지 시도했던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홍상수에게서 (외화면의) 기억이 더욱 내밀한 주제가 된 것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부터 이지 않았나요?― 영화상의 '자연스러운' 비약에서도 감각의 교란이 발생할 수 있는지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가는 말속에서 '과거랑 많이 달라졌다'고 언급되는 현재의 사람들은 과연 그런 말들과 온전히 포개지고 있을까요? 살이 찌지 않고 더 날카로웠던 세원, 무서웠고 준희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만수 말이죠."


"문제는 여기서 발생해요. 우리는 이 눈물과 저 눈물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죠? 그러니까, 복합적이고 때로는 파편적이기까지 한 감정선 속에서 무언가가 하나의 방식(눈물)으로 표현될 때, 그것의 의미를 그 자체로써 이해하는 게 적어도 지금 우리의 능력상으로 정말 가능하냐는 겁니다. 수직 앙각으로 찍힌 프랑스의 눈물에 대해 우리 관객들은 절로 어떤 위화감을 갖게 되지 않았나요? 표현은 표현 그 자체로 성립되고 이해되지 않아요. 쿨레쇼프의 유명한 몽타주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워홀과 셔먼이 공유하는 강박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나' 등식의 무시무시함. 무심해 보일 만큼 표현의 맥락을 잔뜩 교란시킴으로서 브루노 뒤몽은 이미지에 얽힌 우리의 인식을 문제시합니다."


"카후쿠는 너무 많이 책임지려고 하는 남자죠. 스스로가 제때 오토를 책망했다면, 차를 빙빙 돌리지 말고 제때 집에 갔다면 오토와 사별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카후쿠가 자기 주체화에 있어 매저키즘적인 방법을 채택했다는 걸 유념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과 자신의 행위성(agency)간의 인과를 자명한 것으로 설정해 (회의주의적인 형식으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정하는 방법 말입니다. 즉 카후쿠의 불가능성이, 가능했던 가능성을 ‘액추얼’하게 회복하는 쪽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오토를 대함에 있어 카후쿠는 아주 안 좋은 의미에서 마초가 됩니다. 이걸 승인하는 게 <드라이브 마이 카>의 큰 한계 중 하나죠. (재밌게도 이런 한계를 돌파하는 건 같은 해에 나온 하마구치의 다른 영화인 <우연과 상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여전히 옹호하고 싶어요."


"카페크리틱에 합류하고 나서 저는 2022년 12월까지 (특집 기획을 제외하고선) 순서대로 <아네트>, <드라이브 마이 카>, <프랑스>, <리코리쉬 피자>, <소설가의 영화>, <애프터 양>, <우연과 상상>, <헤어질 결심>, <카우>, <2차 송환> 등의 영화에 대해 숙고했습니다. 녹음을 위해 감상한 이 영화들 사이에는 어떤 경향이랄 게 분명히 지나가고 있었죠. 미약하게 혹은 잠깐이라도요. 이 경향은 앞서 길게 얘기한 <이창>의 한 장면과 맞닿아 있어요. 타자에 대한 집요한 의식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만 말한다면 너무 단순한 주장에 그칠 수 있을 거에요. 세상에 타자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이미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지어 급히 메모를 휘갈길 때에도, 우리는 미래의 나라는 타자가 그 메모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문장을 적으려 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좀 더 구체적으로, 다만 적당히 축약해서 말해보겠습니다."


"타자로 인해 나는 구성됩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이 뻔한 말은 타자가 나를 ‘호명’하는 것이나(알튀세르) 소통으로서의 ‘타자경험’을 통해 타자와 서로 속으로(ineinander) 뒤섞이는 것으로(후설) 향하지 않습니다. 내가 타자에 대한 의식과 함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여기서 방점은 행동하는 나에 찍혀야 해요. 앞서 말했듯 이는 퍼포머의 문제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수많은 영화와 이론들은 대개 ‘본다’는 행위의 입장에 서있(다고 받아들여졌)었습니다. ‘시(청)각에 노출된 대상을 어떻게 종합하고 가로지를 것인가’ 같은 문제와 씨름하면서요. (아직은 심증이지만, 이는 미학 전반에서 칸트주의의 판단력론의 '자연스런' 영향력과도 상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어떤 영화들에서 주체의 자리는 보는 쪽이 아니라 보여지는 쪽에 위치하곤 합니다. 저에게는 이게 굉장히 문제다운 경향으로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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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재고소진 이후 얼마 전 E-Book 대여 및 판매를 시작했다. 혹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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