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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Feb 11. 2023

<한밤중에 선과 악의 정원에서>, 1997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드나잇 가든>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우리 시대의 존 포드'라 부르곤 했었죠. 지금 돌아보면 이런 수사는 여러모로 잘못된 것 같습니다. 포드와 이스트우드의 작품 내적인 유사성에서도 말이에요. 거칠게 정리해보건대, 존 포드가 인물이 자신이 속한 세계를 되돌아보며 그 자체의 낯섦을 깨닫거나 그것을 이미지의 표면에 체화하는 영화를 만든다면(<순례여행>과 <청년 링컨>의 마지막 시퀀스) 이스트우드는 인물이 자신의 인식 밖 영역,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연'이라 부른 그 영역에 대해 어떤 선을 어떻게 긋는지를 따라가는 영화를 만듭니다(<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빌이 끝끝내 '신화'를 재현하게 될 때, <설리>에서 설리가 시뮬레이션의 한계를 지적할 때). 즉 포드에게 중요한 건 세계를 거듭 다시/새로 경험한다는 감각이고, 이스트우드에게 중요한 건 세계를 판단하여 (재)구성한다는 감각인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공통점이 아예 없다고 하는 건 무리수일 겁니다. 저는 지금 <미드나잇 가든>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어요. 구속이 결정되고도 영 긴장감을 못 느끼는 듯한 짐을 두고 "저 새끼도 내일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될 거야"라고 했던 변호사 소니가 재판 3일 전에 풋볼 경기를 보러 휴가 가는 장면 말입니다. 포드와 이스트우드에게는 탈선과 우회에 이끌린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물론 이스트우드의 그것이 늘 포드의 난장판처럼 과격하고 과시적이진 않죠. 그는 인물이 내러티브 바깥에 있을 때에 주목하거나(판결 선고 직후 몇 차례 끼어드는 검사의 숏) 인과에 곧장 통합되지 않는 돌발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등(다짜고짜 맨디에게 키스하는 존) 어떤 순간이나 흐름의 '자연스러운' 성격을 미시적인 수준에서 해체합니다.


이런 방식이 그 특유의 편집술, 관객이 시간 경과와 공간의 거리감을 혼동할 만큼 -초반부에 존이 짐의 저택을 나서자마자 잠에서 깬 존으로 점핑하는 플롯- 숏과 씬을 미묘하게 자르고 이어붙이는 편집술과 섞이면서 영화는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형태를 띄게 돼죠. 일반적 형태를 기반으로 영화 형식의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의 초현실(주의) 말입니다. 마냥 흘러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액션과 액션 사이에 미지의 틈새를 만드는 영화, 그럼으로서 세계에 대한 판단을 "목숨을 건 도약"의 문제로 만드는 영화. 그것이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업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볼 때 판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신 판단이 필연적인 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빌리 핸슨은 죽었지만 그의 손은 말을 하죠"라는 존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미드나잇 가든>은 아마도 -아직 이스트우드의 초기작까지 다 보지는 못했기에 이 조건을 달겠습니다- 이런 이스트우드적 방법을 가장 과격하게 '반복'해본 실험작일 거예요.


사바나라는 미국 남부의 이상야릇한 도시를 둘러보는 게 목적인가 싶을 만큼 느슨하고 어수선한 전개로 유명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투어 필름'이라는 조롱도 들었다고 해요. 사바나 관광 홍보용 영상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서라면 이런 조롱은 너무나 정확한 말이 되지 않나요? 왜냐하면 여기서 이스트우드는 이상한 도시 사바나를 오롯이 긍정하는 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죽었다는 걸로 시작되는 영화들은 대부분 둘 중 한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사악한 살인범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사악한 공동체의 음모를 밝히거나. 그런데 <미드나잇 가든>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서 폭력이 취급되는 방식을 관찰할 뿐이죠. 모두가 폭력에 예민하고 폭력을 준비하고 다니면서 동시에 폭력에 낙관적이라는 역설이 사바나를, 나아가 영화의 서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은 폭력을 제어하고 징벌하는 권위라기 보다는 서로의 폭력성을 인정하면서 행동하자는 굳은 약속에 가까워요(판사가 루서의 독극물병을 루서에게 돌려줄 때). '현'와 불화하는 가지각색의 액션 도처에 우글거리는 사바나에서 선형적 역사관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워.


많은 평자들은 이스트우드가 <미드나잇 가든>에서 사바나를 경유해 남부의 정신을 고찰해보고자 했다고 하지만, 여기선 좀 달리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거꾸로 자기 영화의 초현실성을 영화적 장소에 직접 육화해본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한 건 아닐까요? 렘 콜하스의 '정크 스페이스'에 앞서, 마치 예상표절이라도 한 듯 이스트우드는 '대안적 정크 스페이스'를 사바나에서 찾은 거죠. 그렇다면 인물들에게 있어 궁극적인 문제는 (제목이 섯불리 주는 인상처럼) 누가 선하고 악하냐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영화적 장소에 대어떤 판단을 내릴 것이냐일 겁니다. "자넨 자네가 선택한 걸 믿고 나는 내가 아는 걸 믿으면 돼"라는 짐의 마지막 말처럼, <미드나잇 가든>에서 세계에 대한 판단은 투 트랙으로 갈라집니다. 유토피아의 방향성을 갖는 존, 그리고 디스토피아의 방향성을 갖는 짐으로요. 자신에겐 폭력성이 없다고 '믿기로'한 짐은 사바나의 기이한 시간 속에서 빌리의 총알을 마침내 맞습니다. 이는 사바나의 일원에 걸맞는 태도를 버린 짐에 대한 엄준한 심판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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