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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pr 23. 2023

<파벨만스(The Fabelmans)>, 2022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파벨만스>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약간 쉬어가는 느낌으로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파벨만스>를 본 직후에 제일 먼저 떠올린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전 작은 다름 아닌 <쉰들러 리스트>였어요. 정확히는 이 영화에서 논란이 됐던 한 시퀀스, 바로 가스실 시퀀스였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시퀀스는 당시 진행 중이던 '사도 바울' 장 뤽 고다르와 '모세' 클로드 란츠만의 수용소 재현 논쟁과 맞물려, '가스실은 영화적 서스펜스의 공간이 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휩싸인 바 있습니다. 스필버그가 고다르 측과 란츠만 측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은 건 두말할 필요가 없고요. (이 지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서구 철학의 과도한 집착을 해명하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 자리에선 생략하겠습니다) 지금의 제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스필버그는 아마 이런 비난의 논리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스필버그에게 있어 영화는 폭력과 서스펜스니까요. 단지 그의 본격적인 경력이 <대결> 같은 액션 영화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영화 중에서 물리적인 폭력이 아예 묘사되지 않는 작품을 여러분은 떠올릴 수 있으신가요? 심지어 <언제나>나 <터미널>이나 <링컨> 같은 드라마 장르의 경우라도 거기엔 우리의 표정을 일그러뜨릴 만큼 강렬한 폭력과 서스펜스의 씬들이 꼭 있었습니다. 한때 <군마>의 '가려진' 처형 씬을 갖고 휴머니스트로서의 스필버그 운운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화 초반의 격렬한 전투 씬은 모조리 잊어버린 바보들일뿐이죠. (오히려 <군마>는 <우주전쟁>의 반대편에서 폭력과 서스펜스의 묘사를 최대한 단순화해보고자 한 스필버그식 실험의 성공적인 사례라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폭력을 참신하게 묘사할까, 그리고 어떻게 관객들에게 새로운 서스펜스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연출가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이루는 한 축인 거예요. 저는 이런 고민의 근원이 뭐냐 하면, 서로 이질적인 사건 A와 사건 B가 마주치고 엮이게끔 하는 영화의 몽타주가 한편으론 몹시 폭력적이고 한편으론 몹시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E.T.>의 텔레파시를 떠올려봅시다- 그의 의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파벨만스>는 그런 맥락에서 몹시 중요한 영화죠. 스필버그가 영화 속 폭력과 서스펜스에 대한 스스로의 집착을 직접 밝히고 또 해명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영화의 필연적인 성질이라는 걸 수행의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이때 이 말들이 포함하는 의미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그에 따른 서스펜스에서 시작해 갈수록 더 넓어집니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찍어 누르고 찢어버리는' 폭력, 파국과 분열에 흥미를 갖고 향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야기하는 서스펜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생생히 느끼게 해 현재를 소외시키는 폭력... 스필버그는 이런 '영화적' 행위들이 전개되고 이런저런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몹시 꼼꼼히, 설득력 있게 제시하죠. 어쩌면 <파벨만스>는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실험을 자신의 어린 시절이라는 탬플릿에서 실행해 본 스필버그의 연구 노트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영화란 폭력적인 것이라고 외치는 데서 멈추는 냉소주의자가 아니에요. 부모의 이혼 선언 뒤에도 꿋꿋이 영화 편집을 이어가던 새미를 여동생 레지는 비난하지만, 그럼에도 새미가 함께 편집본을 봐달라고 얘기하자 순순히 새미 옆에 앉습니다. 마찬가지로 학교 졸업 파티에서 상영된 여행 영화를 새미 자신은 끝까지 보지 못하지만, 그 이후의 소동은 그를 다시 영화로 돌려보냅니다("말 안 해. 나중에 영화로 만든다면 몰라도"). 즉 삶을 가혹하게 찢어발기는 것도 영화지만, 갈기갈기 찢어진 삶을 그럼에도 살아가게끔 힘을 주는 것 역시 영화인 거예요. 외종할아버지 보리스의 장광설은 결국 그것을 일러준 것이지 않았나요? 영화란 몹시 변덕스럽고 역설적인 대상입니다. <파벨만스>에서 스필버그는 그런 영화를 있는 힘껏 긍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변덕스럽고 역설적인 것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그런 영화를 긍정하는 스필버그 자신이기도 하거든요. <파벨만스>는 영화가 '그럴 수 있었던' 옛날, 곧 필름이 곧 영화이고, 사람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보며 같은 경험을 체화한다고 믿을 수 있으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교차만으로도 관객들의 상상력이 폭발하던 옛날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지만, 사실 그런 옛날이 옛날이 되도록 만든 주요 행위자가 다름 아닌 스필버그 본인이잖아요? <쥬라기 공원>을 통해 발전된 CG 기술을 상업 영화로 끌고 온 사람, TV와 게임과 굿즈 사업을 영화에 긴밀히 연계시키는 영화 프랜차이즈를 발전시킨 사람, 그럼으로서 영화의 생산 양식을 크게 바꿔버린 사람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파벨만스>의 위상은 아주 이상해지죠. 스필버그가 기만적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스필버그가 몹시 역설적인 주체라는 걸 말하려는 거죠. 이쯤에서 많은 평자들이 90년대 이래 계속 논했던 '두 명의 스필버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미는 캠핑 영화의 편집본 두 개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둘 다 아주 정성스럽게 편집해 놨죠. 이처럼 스필버그는 평생 동안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한 몸에 갖고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파벨만스>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강도 높은 역설을 지닌 영화라 해야 할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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