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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pr 27. 2023

『지영』 출간 기념회와 적잖이 늦은 후회담


만화가 지영의 1주기인 지난 2월 25일에 열렸던 만화 『지영』의 출간 기념회에 대한 전체 녹취록이 정리 및 공개되어 여기 소개한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지영』이라는 장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1부 토크의 패널로 참여했으며,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토크를 진행한 리타 님, 한윤아 선생님과 함께) 『지영』이 만화사에 있어 어떤 자리에 놓여진(혹은 놓여질 수 있는) 작품인가를 간략히 따져보고자 했다. 이런저런 장르에 발을 걸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성노동자의 자서전 혹은 르포르타주로도, 그림체와 이야기 사이의 역설을 노린 안티 명랑 만화로도 귀결되지 않는 이 돌출적인 작품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더욱 커질 것이다. 나는 감히 그렇게 믿는다. 


현장에서는 가능하면 지영 님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평범하게' 얘기를 풀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그런 생각이 독이 되어 '평소처럼' 거의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채운 것 같이 몹시 후회된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영 님의 지인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당시 현장의 느낌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리타 님의 의지에 따라 녹취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근데 주술호응이 안 맞는 부분도 그냥 냅둔 건 패널들 중 나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녹취록에는 출간 기념회 현장 전반의 어수선하고 난잡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과할 정도로 잘 녹아있다. 2부 토크인 "흔들리는 1인칭" 파트가 특히 그러하고. 하여튼 그것을 감안하고서, 혹은 기대하고서 읽어주시길 바란다.  





"『지영』을 자기서사 만화라는 장르 속에서 얘기를 하게 된다면, 먼저 자기서사 만화라는 게 어떤 건지 먼저 좀 살짝 얘기해야될 것 같은데요. 서구 만화비평이나 만화이론에서는 1970년대에 로버트 크럼이나... 다른 이름이 당장 생각이 안 나는데, 로버트 크럼을 비롯한 미국 인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만화가들이 자기 가족사, 아니면 자기가 겪은 비극적 일들을 논픽션으로 만화에 녹여내면서 시작됐다─라고 얘길 하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이미 60년대부터 자기서사만화가 굉장히 활발하게 만들어졌었거든요. 그건 아무래도 이제 일본에서 이미 데즈카 오사무가 만들었던 『COM』라든가 아니면 유명한 대안만화 잡지인 『가로』같은 게 있었던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나가시마 신지의 『후텐』이나 아니면 『만화가 잔혹 이야기』 같은 작품들이 있고, 또 여기 계신 분들이 더 잘 알만한 예시를 들자면, 『맨발의 겐』 같은 게 1973년 작이죠. 그 런 작품들이 이미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행하고 있었고, 많이 발달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우리가 얘기하는 맥락에서라면, 우리가 얘기하는─경험을 희화화할 수 있는, 혹은 일종의 감정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자기서사 만화라는 것은 90 년대부터 조금 더 활발히 등장했다라고 할 수 있겠죠. 아까 예시로 들어주신 아즈마 히데오의 작품들."


"오토픽션이라고 불리는. 이제 몇 년 전에 우리한테 정말 그릇된 방식으로 정말 큰 혼란을 일으켰었던 이른바 김봉곤/김세희 사태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저는 그때 문제가 됐던 것들은─작가들이 현실을 그대로 그냥 그대로 옮겨 썼다. 그러니까 ‘걔네들은 그냥 작가가 아니고 그냥 그냥 아무것도 안 한 거야’라는 식의 비판. 그런 비판이 정말 많았었는데 그런 비판은 사실 하나도, 영양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 작품들에서 진짜로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건─강동호, 강보원, 민경환, 오혜진 등의 문학 평론가들이 따로 또 같 이 충분히 얘기를 하긴 했었지만─오히려 그런 작품들, 동시대의 흔한 오토픽션 작품들은 자기가 모든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들을 아우를 수 있는 주체로 자기가 상정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그런 사후성의 에고를 계속해서 수립한다는 점이 문제거든요. 그니까 좀 더 풀어서 얘기를 하면,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을 이제 열거 할 수 있고 그것들을 제대로 나는 돌아볼 수 있어. 하는 식의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사후성의 에고. 그리고 사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토픽션을 비롯한 이른바 ‘페미니즘적’ 소설들에 대해서 굉장히 큰 회의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자기서사들과 비교하면 『지영』은 굉장히 다르거든요. 일단, 일단 사후성의 에고가 없습니다."


"어... 그러니까 제가 오해를 무릅쓰고 계속 계속 ‘『지영』은 평범하다.’ ‘『지영』 은 평범해요. 『지영』은 진짜 평범하다니까요?’ 하고 계속 주변에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건, 그 『지영』에서 다뤄진 어떤 사건들이 평범해서가 아니라 지영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건들을 대하고 사건들을 종합하는 태도가 그것들을 어떻게든 중립화─에고를 중립화하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런 사건들을 일종의 중립화해서 제시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 그런 태도가 몹시 평범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영이 어떤 평범함에 편입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건을... 뭐라고 해야 될까요. 일반성? 네. 우리 사회의 일반성 안에서 보편적, 중립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기보다는 사건 자체를 그냥 중립화 해가지고, ‘이런 삶이 있는데 어떡할 거야? 이런 삶이 있어.’ 하고 그냥 우리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거죠, 사실. 전 그런 점에서 지영이 평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약간 조금 더 부연을 하자면 처음에 리타 님이 ‘장르로서의 『지영』’이라는 토크 제목을 보내주셨을 때 저는 그러면 사실 ‘장르의 틈새로서의 『지영』’이 맞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아까 제가 말했던 것처럼? 명랑만화나, 아니면 자기서사만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 둘 다에서 탈각시키기에는 계속 겹쳐지는 부분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에 『지영』은 일종의 장르의 틈새에 가깝다. 장르의 틈새를 계속해서 벌리는 작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녹취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한 말과 하지 못한 말 모두에 대해 후회가 커진다. 준비한 것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부족하기도 했으나 그건 충분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지영』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짚으며 논지를 전개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데, 증거 없이 썰을 풀려고 하니 전반적으로 말이 붕 뜬다는 느낌이 계속 있기 때문이다. 지영이 만화에서 어떤 식으로 사후성의 에고를 거부하며 어떤 식으로 평범함을 '수행'하는지를 나는 좀 더 상세히 얘기했어야 했다. 가령 "키스방" 파트 중 지영이 당시 애인인 "전형적인 엠생 양아치" 정호와 트러블을 겪는 7번 에피소드를 압축적인 예시로 들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정호의 데이트 폭력은 이전이나 이후와 똑같이 거칠고 단순한 그림체로 몹시 짧게 묘사되며, 한편 정호에 대한 지영의 증오와 연민과 분노와 사랑은 에피소드 안에서 변덕스럽게 교차되지만 결코 하나의 '일반적인' 결론(내 삶엔 정호가 없어야 해/내 삶엔 정호가 있어야 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미친년"인 지영은 심각한 사건을 심각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미친년"인 지영은 이 연애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동시에 스스로를 회복한다("이 병신은 내가 아니면 안 돼!"). 나는 여기서 『지영』 전반을 관통하는 전략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현장에서 얘기 못한 게 아쉬울 뿐.

(*스스로의 오독을 뒤늦게 발견하여 덧붙이는데, 정호는 지영의 당시 애인이 아니라 지영이 같은 업소 언니의 썰을 들으면서 상상한 가상의 인물이다. 혼란을 드려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말을 분명치 못하게 하거나 내 생각과 달리 내뱉은 부분 역시 참으로 후회되는데, 먼저 지영이 "현재성"을 계속 가져간다고 논했던 게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의도에 적합한 표현은 "액추얼리티"가 아니었을까? "현재성"은 '지금'을 지시하는 시제에 관한 것으로만 읽힐 여지가 크다. 나는 지영이 겪는 끝없는 감정의 변화나 지영 특유의 의성어 묘사("저벅저벅", "호잇! 호잇!" 같은 것)까지 포괄해 얘기하고자 했으니 "액추얼리티"가 좀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다. 또한 '『지영』은 평범하다'라고 주장했을 때 내가 분명히 부연했어야 하는 건, 이 평범함이 사건 혹은 자연인으로서 작가 지영의 상태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작품의 태도이고 전략이며 이게 '형식적'인 층위에도 해당되는 진술이라는 것이었다. 썰툰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지영』의 평범함은 "의도치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단서는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오해를 살 수 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지영』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과 『지영』이 어떤 의식 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분리하는 일은, 물론 1인칭의 주체를 몹시 다양한 맥락에서 교란시키고 있는 『지영』의 특성상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지영이는 이런 사람이었는데요?"라는 식의 반문은 정작『지영』에 대해선 엄청난 오독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필요한 일이긴 하다.


또 하나 아쉬운 건,『지영』의 날카로운 유머에 대해서도 충분히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말이 나왔듯 지영은 재미의 포인트를 세밀한 수준에서 고통스럽게 고민했고, 실제로 나는 이 만화를 보는 동안 거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독자들이 선택당한다'"는 리타 님의 말처럼 여기서 웃음을 얻어갈 수 있는 게 '특정한' 독자들 뿐이란 것 역시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그 기원이 민망함이든 공감(성 수치)이든 어처구니없는 인식이든 간에, 『지영』은 웬만하면 웃음과 함께 봐야하는 작품이라고 나는 여전히 확신한다. 하지만 "강간 백번"이나 "낙태비빔밥"의 유머를 감각적으로 납득할 사람이 남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져봐도 몇 안 되리라는 것 역시 여전히 확신한다. 또한 동시에 그런 사람이 반드시 『지영』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해본 이가 아닐 수도 있단 것 역시 여전히 확신한다. 그렇기에 『지영』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말씀하신 한윤아 선생님과 이를 두고 토론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일단 생각만은 해봤다. 하여튼 『지영』이 특수한 사건들을 중립화하고 유머러스하게 소화해 제시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제시된 사건들에 '우리'가 어째서 웃을 수 있는지 좀 더 고민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고있는 (장르가 아닌) 조류로서 '멘헤라 만화'의 맥락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날이 고맥락화되어가는 동시에 나날이 단순화되어가는 코미디 쇼의 맥락에서. 

 


이 이외에도 하고 싶은 말은 많다만, 다음 마감의 불똥이 이미 무릎까지 올라와 활활 타고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쓴다. 나중에 『지영』을 더 세세히 논할 자리가 제발제발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근데 과연 언제가 될까? 나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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