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May 13. 2023

누가 긍정을 두려워하는가

「베네치아에서 죽다」 추천의 말


(아래는 2023년 5월 12일 민음사 쏜살문고에서 새로 번역 출간된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에 실린 추천의 말이다.)





결국 여러분이 이 짤막한 소설에서 읽게 될 것은 치열한 긍정의 태도다. 너무나 치열해서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괴이해 보일 정도의 긍정. 물론 다른 것들도 있다. 한 강건한 소설가가 우연한 짝사랑 탓에 완전히 무너지는 과정이, 그리고 그 소설가의 지나치게 예민한 시각(視覺)이 겪는 아찔한 모험이, 저자 토마스 만 스스로의 성적 지향과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당시 모더니스트들이 공유하는) 애착이 뒤얽힌 호모섹슈얼리티의 기류가, 감성과 이성 사이의 긴장에서 창작의 근원을 찾는 토마스 만의 예술관이,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문체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는 데카당한 무드 등이 여기에 포개져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겹들의 목적지는 결국 치열한 긍정이다. 


하나 긍정이라 해도 주어진 모든 것을 순순히 수긍하고 낙관하는 방식의 긍정은 전혀 아니라서, 우리의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셴바하는 자기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것들에 짜증을 느끼고 속으로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차라리 그를 위대한 지성의 소설가 이전에 불평불만의 대가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한데 아셴바하는 그저 성격 고약한 늙은이지만은 않은데, 「토니오 크뢰거」부터 『파우스트 박사』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예술가’를 자기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 집요하게 괴롭히던 토마스 만의 성질이 이 「베네치아에서 죽다」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괴롭힘? 주인공들의 바램을 철저히 거스르고 짓밟는, 주인공에게서 ‘주인’됨을 부정하는 괴롭힘.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지쳐 있던 아셴바하의 정신은 이러한 만의 괴롭힘 속에서 말 그대로 파멸로 향한다. (여담이지만, 루키노 비스콘티가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영화화한 건 이런 괴롭힘이 작가로서 말년에 접어든 자신의 성질과 공명한다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긍정이 여기서 펼쳐지는가? 바로 추(醜)와 파멸에 대한 긍정이다. 단지 그 존재를 인정하거나 ‘그로테스크’의 맥락에서 긍정하는 게 아닌, 순수한 경이로 가득 찬 긍정. 오랜 세월 아셴바하가 힘겹게 고수해 오던 세계관이 한 번의 짝사랑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가 점점 변화해 가는 과정을 낱낱이 써 내려가며, 토마스 만은 그 과정과 결과 모두를 일말의 연민도, 경멸도 없이 긍정할 수 있다고 치열하게 중얼거린다. (그래서 이러한 긍정은 독자로 하여금 기괴함만큼이나 질투심을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그런 긍정이 과연 가능한지 가늠해 보고자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는 않았을까? 실존 인물의 전기 마냥 아셴바하가 어떤 소설가였는지를 꼼꼼히 설명하는 데에 무려 한 장(章)이 할애됐다는 걸 떠올려 보면, 증명할 길은 없어도 퍽 그럴싸한 가설처럼 느껴진다.


오해를 피하고자 덧붙이건대, 나는 지금 아셴바하의 (짝)사랑과 긍정을 동일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짝)사랑이 없었다면 만/아셴바하가 추(醜)와 파멸을 긍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 소설에서 (짝)사랑은 긍정 자체가 아니라 긍정의 대상 중 하나일 뿐이며 긍정을 위한 결정적 조건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긍정이란 대체 무엇을 향한 것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곧 소설로 넘어갈 여러분을 위해서 지나치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성싶다. 그래도 「베네치아에서 죽다」가 무엇보다 아셴바하의 이야기이며 아셴바하의 정신이 겪는 모험이라는 사실은 약간의 힌트로 생각하시라. 아셴바하가 어떠한 정서와 욕망을, 그리고 스스로를 ‘느끼는지’ 따라가다 보면 내가 여태껏 흩뿌린 말들이 비로소 이해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대상에 세월을 바치고, 건강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사랑은 사실 환상적이고 아름답기에 앞서 아주 추하고 광기 어린 짓이다. 스스로를 난관에 밀어 넣고 철저히 갉아먹으면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시도가 추하고 광기 어린 짓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사랑에 빠진 자는 바로 그렇게 스스로를 구하고 또 긍정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기본적 프로세스라 할 수 있으리라.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이 기꺼이 책임지겠다는 (양가적) 제스처이기도 함을, 나는 이번에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새 판본으로 읽으면서 거듭 확신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결국 여러분이 이 짤막한 소설에서 읽게 될 것은 치열한 긍정의 태도인 것이다. 너무나 치열해서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괴이해 보일 정도의 긍정. 

작가의 이전글 『지영』 출간 기념회와 적잖이 늦은 후회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