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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l 21. 2023

『악인의 서사』 출간


돌고래에서 앤솔로지 『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출간다.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창작 서사에서 악을 재현하는 문제에 관해 독자들과 한층 심화된 이해와 입체적 고민을 나눠보고자 한"다는 목표 하에 기획된 이 책에는 각양각색의 필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했는데, 이 중 하나인 나는 책의 말미에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이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오늘날 악(당)을 재현하는 데 쓰이는 '보편적인' 모티프 -'악', '악당', '부정적인 것'- 들에 대한 동역학적 탐구에의 스케치 목표로 쓰인 글로, 아마 「만화와 불가능한 만남 - 『러스티 브라운』에 대하여」와 함께 지금까지 내가 발표한 것 중 (퀄리티나 세부적인 접근과는 별개로) 가장 야심찬 작업물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이 글은 처음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의 서평 느낌으로 시작했으며 나중엔 원고지 200매 가량의 초고를 한참 고통스럽게 정리하고 정리한 끝에야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많은 디테일을 단순화하고 축약했기에 만족과 아쉬움이 함께 있는 결과물이고,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스케치를 나중에 꼭 두텁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어떤 분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영화나 소설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또한 문예평론 보다도 비교문학 에세이에 더 가깝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듭된 탈고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 (영화 글도 계속 쓰고 영화제 일도 간간이 맡는 것과는 별개로) 갈수록 좁은 의미에서의 '영화(평론)판'에 대해 스스로가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랫동안 힘들게, 또 공들여 작업한 결과물이 실려있기도 하고, 몇몇 믿음직한 '동업자'들의 작업이 실려있기도 해서 책에 적잖은 애착이 생긴다. 늘 그렇듯, 재밌게 읽히길 바라고 있겠다.






"악당에 대한 이야기가 일반화된 건 악당과 악에 대한 주관적인 혼동과 선호 때문만이 아니다. 재현과 현실이 뒤얽히는 객관적 수준에서 악당과 악의 분리 및 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인식에 있어 악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 손에 쥘 수 있는 모티프와 재현 방식들이 서로에 대해 멀어지고 또 변모하고 있다. 호모포비아들에게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하는 강도 높은 “‘괴상함(queerness)’을 모욕이자 자긍심의 원천으로 삼”아 “자발적으로 부정성의 영역에 머무는” 전유의 재현이 (아직까지도!) 퀴어들에게 유효한 전략이듯이. 악을 사유함에 있어 이글턴이 간과하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런 팽창에 가까운 분화 자체일 테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는 이런 분화를 포함한 악의 동시대적 양상을 기록할 (언젠가 도래할) 지도책을 위해, 악(당)의 재현을 이루는 모티프들을 스케치해보자."


"그렇다면 셸링에게 ‘악’이란 “예지적 본질”을 결정 짓는 모종의 의지 혹은 ‘정신(Geist)’으로 이해된다고 봐야할 테다. 하지만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이 책에서 ‘정신’이라고 말할 때 셸링은 그 말이 때에 따라 지시하는 게 경험―그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근거”―에 따른 개인의 정신인지, 혹은 (자신의 ‘친애하는 적’ 헤겔이 논한) 선험의 자리에 있는 세계의 정신인지를 매번 헷갈리게 만드는 모호한 글쓰기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의 구절은 어떤가? “이 [공공연한 선과 악의] 싸움 안에서 신은 정신으로서, 다시 말해 현실적인 것으로서 스스로를 계시한다.”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신이라……. 오늘날의 독자들은 여기서 ‘정신’ 자체의 위상적 교란이 문체로 교묘하게 체화된 것을 보게 된다. 어떤 교란? 경험과 선험 사이의 순환으로서의 교란."


"하지만 ‘사실상의 권력자’였던 전두환의 지위가 박근혜 정부의 개입에 의해 손쉽게 흐트러 졌던 사실과, 그의 최측근이었던 민정기가 광주에서의 재판에 들어가기 전 '치매 노인이 뭔 소리를 할지 몰라' 그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 는 그의 여생에 대해 좀 더 숙고할 여지를 주지 않는가? 특히 후자의 경우에서 민정기가 그런 수단을 쓰면서까지 보호하고자 한 대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살아있다는 사실만 남은 전두환의 마지막 명예?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이른바 ‘민정계’의 위신? 둘 중 무엇이든 간에, 한 때 권력의 네트워크라는 도마뱀에 있어 머리와 같았던 전두환이 순식간에 꼬리가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허면 그가 한국 사회에서 상징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이쯤에서 정리해보자. ‘악’, ‘악당’, ‘부정적인 것’. 이 세 가지 모티프가 이루는 삼각형이 악을 재현하려는 시도들에 있어 주요한 장치(dispositif)가 된다. 배치 방식에 따라 특정한 이념을 구성하는 한편 그러한 이념을 재정위(再定位)하거나 교란시키는 데에도 열려 있는 생성적인 요소로서의 장치. 굳이 이런 표현을 쓴 데서 짐작했겠지만, 이는 하나의 상을 얻기 위해 쓰이는 모티프일 뿐 그 자체로 하나의 상을 이루는 개념은 아닌데, 셸링의 말을 반복하자면 “힘들의 무질서를 가지고 이 근원적인 악행을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처음에 이 모티프들이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며 악을 재현하는 방식들도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서구에서 (여러 시기에 여러 형태로 나타났던) 『라모의 조카』 이래 비로소 발견되고 발전해온 이런 인식 은 아직까지도 온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국내 번역 출간 예정인) 「치와와」(1994)는 오카자키 쿄코의 에센셜이라 할 만한 단편이다. 토막 살해 당한 소녀 치와와를 그의 남겨진 친구들이 추모하는 만화, 라고 적당히 축약해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치와와의 죽음을 “물질과 정보가 대량 소비되는 도시에서 농락당한 젊은이가 극장 도시 도쿄에서 연기한 전형적 비극”이라 평하던 한 평론가를 두고 “멋대로 떠들어대는 저 녀석들도 죽여버리고 싶어.”라 쏘아붙인 유미를 떠올리면, 여기서의 추모란 일반적인 추모와는 다른 무언가인 듯하다. 그래, 「치와와」에서 펼쳐지는 ‘난잡한’ 추모는 치와와의 삶이 ‘그 따위 것’이 아니었다고 외치는 대신 실제로 ‘그 따위 것’이었던 치와와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도록 하려는 필사의 ‘조작’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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