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경마장 가는 길>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부정할 의지도 없이 단언컨대, 감독으로서 장선우는 지독한 여성혐오자입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전의 그의 영화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다시 보여진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지난 날에 '한국 사회가 섹슈얼리티를 소화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라는 식으로 그의 영화들이 독해되곤 했지만,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꽃잎>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 여자는 (성적인) 몸으로써만 '말'을 한다는 식의 생각을 미학화한다는 점에서 거기엔 오히려 빈약하고 폭력적인 성 관념이 깔려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명목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렵죠. 그런 맥락에서는 장선우를 동시대 속에 구제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그냥 기각하자고 말하려는 건 또 아닙니다. 그보다는 장선우의 섹슈얼리티를 다른 방식으로 맵핑해보자고 제안하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먼저 <경마장 가는 길>을 '한국영화'로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기묘함이란 아마 미시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종잡을 수 없은 시간선에서 기인할 터입니다. 물론 장선우는 이후의 홍상수처럼 직접적으로 시간선 자체를 일그러트리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죠. 하지만 씬이 바뀔 때마다 설정 쇼트나 적당한 동선이 제시되지 않고, 구체적인 날짜의 변화도 주어지지 않고 인물들의 말도 자꾸 파편화되거나 번복되곤 하니 우리의 일상적인 방향감각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영길의 건조하고 을씨년스런 화면은 그런 기묘함을 더더욱 배가시키죠. 그런데 기묘함을 느끼는 건 우리 관객들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거기에 거의 시달려요. R은 아내와 이혼하지도 못하고 J와 만족스런 섹스를 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매번 R을 당혹시키는 J는 R에게 "나더러 뭘 어떡하라는 거에요"라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칩니다. R의 아내는 R이 이혼하려는 이유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R의 아이들은 아버지 답지 않은 아버지를 그저 망연히 지켜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거에요. 불가능한 균형을 잡으려는 몸짓의 부조리함이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의 거의 모든 겹에 퍼져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비유적으로 말해, <경마장 가는 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집이랄 것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R의 대구 본가의 외관과 J의 집이 영화상에 단 한 번도 제시되지 않은 것처럼요. 그렇다면 R이 놓여진 곳은 어디인가요? J의 말대로 다름아닌 한국입니다. 보다 정확히, 프랑스 파리가 아닌 서울과 대구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R은 J 자체를 갈망한 게 아니라 J와 보낸 파리에서의 시간을 갈망한 거라고요. 연인과의 음탕한 생활, 연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미루면서까지) 대필한 박사학위논문, 고국이라는 근원으로부터의 자유... 사람들이 첫사랑을 기억하는 이유가 사실 '그 시절'의 자신을 향수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이듯, R은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파리에서의 3년을 '지금 여기'인 한국에서 보상받고 보충하고 반복시키기 위해 (적어도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거에요. 다른 어떤 여자도 아닌 J와의 섹스에 집착하는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겠죠.
하지만 '지금 여기'로서의 현대 한국은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J는 자신과의 관계를 변덕스럽게 번복하려고 하고, 아내는 자신과의 관계를 형식적으로라도 고수하려고 하죠. (이 둘 모두가 암묵적으로 내세우는 건 '정조'에 대한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무의식입니다) 마찬가지로 R은 악재만 가득한 대구를 벗어나고 싶지만 서울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파리에 익숙해진 사이 한편으론 너무 많이 변했고("이게 60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이 맞나?") 한편으론 하나도 변하지 않은(반공 삐라를 길거리에 던지는 자동차) 분열적인 한국의 시간성은 R을 계속 당혹시키죠("서울에 와서 무력해졌어"). 단지 아련하게 남은 과거와 잡히지 않는 미래를 담고 있는 말을 계속 지껄이는 수밖에요. 그 행위만이 '지금 여기' 바깥의 가능성을 상기시키니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단 한 번 쓰였다는 걸 이쯤에서 생각해봅시다) 즉, 이 영화를 가득 채운 말들은 한국에서의 삶을 견디기 위한 위악스런 수단인 것입니다. 비슷하게 <엄마와 창녀>의 장 으스타슈의 말이 그렇듯이요.
그러면서 그의 노력은 협박과 욕설과 그루밍으로 빠르게 변모해가요. 청혼한 남자에게 자신과의 동거 생활을 알려야 한다고, 자신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줘야한다고, 불만족스런 섹스로 인한 임신은 모순이라고 J에게 우기는 식으로요. R은 가면 갈수록 견디기 힘들 만큼 우스꽝스러워지고 끔찍해집니다. 만족스런 섹스 이후에도 그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충족될 리 만무해요. 그래서 그는 아예 파리로 함께 돌아갈 것을 J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R이 J에게 이 말을 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R이 간과한 것은, J가 변덕스럽고 분열적인 만큼 스스로도 변덕스럽고 분열적이라는 사실이죠. 스스로가 여자나 가족에게 얽메이는 걸 견디지 못하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그들을 맘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 역시 견디지 못하는 R은, 상상 속 '파리지앵'이 아니라 너무나 전통적인 한국식 '꼴마초'에 지나지 않잖아요? 달리 말해 한국을 혐오하는 그 자신 역시 흔한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우스꽝스럽고 끔찍한 무의식을 재생산하고 있는 거에요. (장선우가 하일지의 원작 소설에서 찾은 행간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이 영화 속에서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떠올려봅시다. J의 출산도, R의 이혼과 도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한국은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잠정성의 국가인 것입니다. 혹은 거꾸로 말해, 장선우는 그런 잠정성의 조건에 놓인 한국을 고스란히 영화의 장소로 육화한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거죠. 물론 장선우는 (적어도 여기서는) 탈냉전이나 소비사회 같은 지정학적/사회학적 개념을 직접 끌고 오지는 않아요. 다만 인물들이 주고 받는 세속적인 말, 앞서 말한 "한국에서의 삶을 견디기 위한 위악스런 수단"으로서의 말을 통해 '지금 여기' 한국에는 당장 가능한 변화가 없다고 에두르듯이 하지만 집요하게 역설하죠. 장선우는 남한의 잠정적인 성격이 개개인의 섹슈얼리티의 층위에서부터 형성된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선우의 섹슈얼리티는, 김기영의 섹슈얼리티가 '문명 속의 불만'을 폭발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화하고 임권택의 섹슈얼리티가 세계의 어떤 압력 속에서 파괴되거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몸을 그리는 수단으로 화하며 홍상수의 섹슈얼리티가 시간 속에서 자아를 짓이기고 괴롭히는 수단으로 화하는 것과 달리, 잠정적인 남한의 시간성에 탈주선을 그으려는 (하나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우스꽝스런 숭고'의 제스쳐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의 미스테리한 마지막 장면을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R은 대구의 본가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창 밖을 보다 깜짝 놀라죠. 그의 눈이 본 건 나이 든 시골 여자들과 개발되지 않은 농촌의 풍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대구에있을 때엔 가족들 외에 마주친 여자가 없을 뿐더러, 그가 버스 안에서 창 밖의 풍경에 눈길을 던진 적도 없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말하자면 R은 대구를 엄연한 장소로서 생전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득 끼어드는 (영화의 첫번째 숏의 아웃테이크를 쓴) 플래시백. 이 평행편집은 공항과 농촌을 비교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닙니다. 반대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파리에서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걸 R이 마침내, 이제사 깨달았음을 보여주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쭉쓰여지지 않던 소설을 마침내, 이제사 쓰는 것 말고는요. <경마장 가는 길>은 거기서 (명시적으로) 끝나고 (잠재적으로) 시작합니다. 냉정하다면 냉정하고 서글프다면 서글플 이 결말에서 한국은 잠정적인 공간으로 남죠. 세간에서 말하듯 <경마장 가는 길>이 장선우에게 있어 터닝 포인트라면, 바로 그런 한국을 영화의 장소로 삼는 일의 곤란이 여기서 전면화되었고 그 이후에 그의 영화에서 집요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경마장 가는 길>을 포함한 장선우의 영화를 동시대에 굳이 다시 논할 필요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영화'라는 허황된 관념이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한국영화'로서 장선우의 작업들은 그 붕괴가 실은 우리들이 딛고 선 오랜 기반이었음을 냉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유의 가능성이 없다는 고유함만을 지닌 잠정적인 한국(영화). 어쩌면 그가 '자기반영적'이라 불리곤 하는 장치들을 끌어들이고, 카메라에 과도한 자율성을 부여하며, 나아가 영화로 해프닝을 일으키길 즐겼던 건, 이러한 한국에서 가능한/할 당대적인 액추얼리티를 영화로써 가늠해보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쁜 영화>와 <거짓말>이 그랬던 것처럼) 그 와중에 영화가 형식적으로 몹시 앙상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더라도 말이죠.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는 여전히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제가 장선우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사의 정전(Canon)을 새로 세우려 한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오히려 장선우는 정전의 불가능성을 가열차게 울부짖는 감독이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장선우의 태도를 우리의 것으로서 우리의 손으로 직접 굴려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