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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l 28. 2023

알레고리로서 아톰?


(아래는 「만화라는 이상한 관계 - 「인문학적 감수성」에서 시작하는 사고 실험」 중에서 <우주소년 아톰>과 그에 대한 선행 연구들을 다룬 부분만을 발췌한 글이다.)







(...) 이러한 형상들 가운데서도 만화의 성질을 가장 통렬하게 직시하고 체현한 형상을 찾는다면 역시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의 아톰(을 비롯해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캐릭터들)이 걸맞을 테다. 원전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대체한 존재이자 자신의 몸을 얼마든지 갈아 끼우고 마력(馬力)마저 조절할 수 있는 아톰, 그렇기에 인간과 로봇 중 어느 쪽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곤란에 처해 있는 아톰. 성장하지 못하고 영원히 소년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아톰…….



이는 물론 오쓰카 에이지의 ‘아톰의 명제’를 충실히 나열한 것이다. 과연 “살을 가진 몸, 성장하는 신체를 그리는 데에 부적합했던 디즈니식 표현 방법의 한계를 향한 데즈카의 자기 언급”(『아톰의 명제(アトムの命題)』)으로서 기호성(로봇의 몸)과 신체성('인간적'인 마음) 모두를 가진 아톰은 전후 일본 만화에서 이어져 온 ’(남성성의) 성장 불가능성’이라는 역사적 집단 무의식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지만,1) 그럼에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톰에 내재한 모순을 거의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아마도 당대의 주류였던 형식주의 비평의 흐름에 맞서고자) 오쓰카 에이지는 그것이 일본이라는 환경만이 아니라 만화의 일반적 문제에도 맞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일부러 무시하고 봉쇄한 것으로 보이는데,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비판했듯 이런 봉쇄는 윤리적 테제에 함몰되어 캐릭터의 다른 존재 방식을 간과하는 패착을 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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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맥락에서 『부흥문화론』의 후쿠시마 료타가 전개한 데즈카 오사무론은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전후 일본의 현실적 문제점이 직접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데즈카에게서 ‘일본/자연 부정의 욕망’의 근원을 도출하려 하지만, 그 이전에 오쓰카가 지적했듯 전후의 상흔은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의 표면, 곧 아톰 자체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후쿠시마는 일본 만화 특유의 무국적성을 다뤄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다소 성급한 분석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존재 방식? 이에 대한 설명은 이토 고의 몫이다. 『데즈카 이즈 데드(テヅカ・イズ・デッド)』에서 그는 오쓰카적 봉쇄를 넘어서고자 ‘캬라(キャラ)’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를 '캐릭터'와 분리시키는데, 후자가 자기 동일성을 가진 극 중 인물을 이른다면 전자는 동일성이 가시적으로 인식될 수 있게끔 하는 기술어구적 형식을 이른다. 얼핏 오쓰카의 기호성/신체성 구도에 대한 몰지각한 반복처럼 보일 수 있으나, 여기에서 이토의 초점이 캬라의 자율화에 맞춰져 있다는 지대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캬라는 이야기 바깥에서도 즉각 인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어진 이야기를 초과해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하는, ‘텍스트로부터의 유리 가능성’을 지닌 이미지를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게 이토 고는 오쓰카의 길의 정반대 방향을 향해 질주한다.('모에'가 이론화되도록 이끈 아즈마 히로키와 사이토 타마키가 각자의 2010년대의 저서에서 따로 또 같이 이토 고를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그는 데즈카 오사무의 「지저국의 괴인(地底国の怪人)」에 등장하는 토끼-인간 미미오를 중요한 형상으로 지목한다. 극 중 인물들에게나 독자들에게나 그저 귀여운 캬라 정도로 인지되던 미미오가 서사 속에서 이런저런 활약을 펼치고, 직접 인간으로 변장해 적을 무찌르기도 하다가, 종국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이론의 여지 없는 캐릭터의 위상을 얻을 때, 이토는 거기서 만화의 근대적 ‘제도’의 시작을 본다. 데즈카가 이야기를 초과할 수 있는 캬라의 자율성을 인지하고 그에 의존하면서도 ‘이야기에 대한 봉사’를 위해 그것의 강도를 적당히 억압하고 은폐하는 방향을 향했으며, 그 과정이 알레고리로 이 작품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캬라의 자율화는 (오타쿠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20세기 후반에 형성된 게 아니라 만화의 초창기에서부터 이미 선험적 배경으로 잠재되어 우글거리고 있던 게 된다.


이쯤에서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앞서 가상으로서의 캐릭터를 논한 대목에서 나는 분명히 이토 고를 의식하고 있었다. 또한 캬라 개념이 없었다면 만화적 단면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미약한 현전성을 감히 주장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토 고의 논리 역시 데즈카 오사무에 있어서는 한계를 갖고 있다. 어떤 한계? 일본 만화에 있어 데즈카가 억압과 은폐의 근대적 제도를 구축한 인물이라고 단정 짓는다는 한계.

다시 아톰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아톰에 내재된 반(半)인간성이라는 모순은 오히려 캬라에 대한 억압과 은폐의 실패를 어떤 방식으로든 끈질기게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아톰이 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있지만 영원히 소년의 모습으로, 곧 과잉된 캬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게다가 이토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지상 최대의 로봇」편에서 아톰 행세를 하기 위해 맨몸에 팬티만 걸친 채 플루토를 상대하러 가는 우란이나, 「로비오와 로비에트」편에서 아톰의 가면을 쓰고 로봇들을 해치는 야니 나츠타 박사는 아톰의 캬라의 자율화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데 후자에서 야니 박사가 아톰의 가면을 쓰는 장면이 작품 안에서 '직접'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캬라의 억압이라는 관점은 아톰에게서 (그리고 데즈카에게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미학적 형상으로서의 아톰은 어떤 제도에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아톰은 이 이미지와 저 이미지 사이, 서술성과 이미지성 사이, 순간과 과정 사이, 단면과 단면 사이, 단면과 캐릭터 사이에서 끝없이 진동하면서 성립하는 관계인 만화의 다른 모습이다. 나아가 아톰의 창조자인 데즈카 오사무는 이런 진동이 멈추지 않도록 평생을 걸쳐 싸운 ‘만화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인식과는 달리 데즈카는 이미지 생태계의 변화에 부단히 발맞추며 만화의 가능한 관계 방식을 매번 달리 시험한 ‘동시대인’(조르조 아감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만화의 성취란 이런 기기묘묘한 메커니즘 혹은 관계 방식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는 구체적인 미적 양식으로서 육화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래, 우리가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말은 우리와 이미지(들) 사이의 상호 영향 관계를 지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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