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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ug 28. 2023

「치와와」와 ‘부정적인 통일’


(아래는 『악인의 서사』에 실린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 중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 「치와와」를 논한 부분을 발췌하고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인 글이다. 참고로 「치와와」쪽프레스의 홈페이지에서 한시적으로 읽을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라기보다는, 「치와와」를 경유한 비평적 에세이이자, 오는 10월 중에 진행될 '오카자키 쿄코 북클럽'의 맛보기 정도로 생각하며 읽어주시길 바란다.)











(...) 당연하지만 나는 도덕을 물리치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품고 있는 순진한 작품들이 즐비하단 것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도덕을 압박하고 도덕에 대해 어떤 틈새를 만드는 일로서의 ‘조작’을 논하려는 것이다.


『핑크』(1989), 『리버스 엣지』(1993), 『헬터 스켈터』(2003) 등의 장편을 비롯한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들은 이러한 ‘조작’의 숭고한 예에 속해서, 오카자키는 일반 사회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어리숙하고 천박한 캐릭터들(학교 폭력을 당하는 게이 소년, 교사를 성적으로 협박하는 학생 커플, 비혈연 근친에 빠져 양부모를 살해하고 여행을 떠난 남매 등)을 끈질기게 따라가면서도 그들의 삶을 (흔한 오해와는 달리)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모종의 스펙터클로 만들지 않는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의 어리석음, 사랑스러움, 낭만, 경악스러움, 냉소 모두를 포괄해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만화가로서 오카자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국내에 단편집으로 번역 출간 예정인) 「치와와」(1994)는 오카자키의 에센셜이라 할 만한 단편이다. 토막 살해 당한 소녀 치와와를 그의 남겨진 친구들이 회상하고 추모하는 만화, 라고 적당히 축약해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치와와의 죽음을 “물질과 정보가 대량소비되는 도시에 농락당한 젊은이가 극장 도시 도쿄에서 연기한 전형적 비극”이라 평하던 한 평론가를 두고 “멋대로 떠들어대는 저 녀석들도 죽여버리고 싶어.”라 쏘아붙인 유미를 떠올리면, 여기서의 추모란 일반적인 추모와는 다른 무언가인 듯하다. 그래, 「치와와」에서 펼쳐지는 ‘난잡한’ 추모는 치와와의 삶이 ‘그 따위 것’이 아니었다고 외치는 대신 실제로 ‘그 따위 것’이었던 치와와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도록 하려는 필사의 ‘조작’인 게다.


금방 ‘난잡한’ 추모라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작품은 치와와의 삶을 반추하는 각자의 인터뷰 모음이라는 (<시민 케인>의 계보를 잇는) 플롯을 취하고 있는데, 인터뷰이에 따라 가지각색의 말이 담기는 데다 치와와에 대한 나쁜 이야기들도 적잖이 섞여 들어가서, 이 인터뷰들이 치와와를 추모하기 위한 영상에 제대로 쓰일 거란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는다. 적어도 일반적인 '점잖은' 추모라면 말이다. 그러나 멍청하고, 빚을 어처구니없이 만들고, 뒤에서 남 욕을 하고, 주변 남자 친구들에게 걸핏하면 펠라티오를 해준 치와와를 정말 애정과 함께 추모하려면 이런 ‘난잡한’ 추모를 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아니, 해야만 한다.



도쿄의 지정학적인 ‘악’에 휘둘려 ‘부정적인 것’들에 시달린 비극으로 치와와의 삶을 환원하려는 게 (도덕에 따른) 일반적인 추모라면, 치와와에게 결부된 ‘부정적인 것’들과 ‘악’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건 ‘난잡한’ 추모일 테다. 그런 추모 속에서 치와와의 삶은 지극히 복합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여러 인터뷰에서 묘사되는 치와와의 삶에는 즐거움과 슬픔이, 순진함과 비열함이, 도덕에 대한 갈망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끌림이 공존한다. 프리드리히 셸링이 말한 “예지적 본질”의 명징한 사례와 같이 모순적인 삶. 지그재그의 선으로 한 여자의 초상을 그리는 「치와와」는 (발터 벤야민을 맘대로 베껴) 말하자면 현대적 ‘수난극’의 하나로서, 주인공이 자기 삶의 희생자가 되는 것과 자기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 사이에서 항구적으로 진동하는 미지의 영토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는 (도덕의 구축 자체는 존중하면서도) 도덕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전부가 되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저항으로서 숭고한 (그리고 그만큼 황당무계한) ‘조작’이다. 도덕이 결코 충분히 이해하고 포괄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다고, 혹은 도덕 바깥에서도 삶은 여러 갈래로 계속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기. 스탠리 카벨이 ‘시민적 삶(civic life)에의 항체’라 불렀던 일,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변증법의 세속적 갱신을 위한 사투랄까? (혹은 들뢰즈라면 변증법에 대한 세속적인 저항이라 불렀을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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