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내내 천방지축얼렁뚱땅빙글빙글돌아가는짱구의하루처럼 보내느라, 그간 비평가 직함을 달고 무슨 일을 했었는지 바로 기억이 안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12월 중반을 넘어가니 올해 안에 발표할 것들은 다 발표했단 생각이 들어서, 나를 위해서라도 여기에 업데이트하지 못했던 올해의 작업들을 한번 정리해 적어 본다. ('의무방어전' 느낌으로북토크나 영화제에 참여한 것은 굳이 셈하지 않았다.)
지젝키언도 아니면서 강연할 때 정말 코를 많이 만진다
4월 12일
은평뉴타운도서관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너의 이름은.>에 대한 특강을 진행했다. 원래 도서관 측과 얘기를 나눈 건 어떤 주제에 대한 연속 강좌였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시의성 있는' 특강으로 급히 계획을 틀었다. 당시 신카이의 근작 <스즈메의 문단속>의 국내 관객수가 400만 명을 막 넘어선 차였고, 또한 개인적으로 지난 2016년 이래 그를 '거장'이라기보단 '이상한 작가'로서 계속 신경 쓰며 이에 대한 얘기를 충분히 털어놓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너의 이름은.>을 주제로 삼았다.
"신카이 마코토는 상이한 세계관이 충돌하고 뒤섞이는 것으로서의 사랑을, 상이한 세계들이 충돌하고 뒤섞이는 것으로 치환합니다. 달리 말해, 신카이에게 있어 사랑이란 서로 마주칠 일 없던 것 같던 두 '남녀' 캐릭터와 그들 각자가 속한 두 세계가 한 '작품' 속에서 서로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맺는 비대칭적이고 미스테리한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신카이가 사랑의 이런 특성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어 있다는 거죠. 그의 필모를 한 번 간략하게 돌아볼까요? (...) 두 세계가 마냥 평화롭게 결합하지 못하고, 결합의 시도는 번번이 폭력이나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혹은 그의 여러 캐릭터들이 (최소한 작품 내에선) 명확한 연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기껏해야 잠깐의 '썸' 정도에 머문다는 걸 떠올려봅시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랑이 두 사람을, 나아가 세계들을 파멸시키면 어떡하지?'"
"여기서 맨 처음에 등장한 건 미츠하가 된 타키였죠. 타키도 미츠하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이어지는 건 미츠하의 이야기죠. 타키가 된 미츠하까지 포함해서요. 영화는 처음부터 신체와 영혼이 어긋난 상황에서 시작해요. 이것 때문에 영화의 구도가 뒤로 갈수록 되게 난해해집니다. 앞서 신카이가 세계관의 충돌과 뒤섞임으로써의 사랑을 세계의 충돌과 뒤섞임으로 치환한다고 말했죠. 그렇다면, 왜 하필 이 두 사람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선택받은 아이'가 된 걸까요? 저는 여기서 세계의 어떤 정신, 말하자면 '존재 자체로서의 신'이 이토모리를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을 무작위적으로 선택했다는 관점을 취하진 않을 겁니다. 거기서 멈추는 건 아무래도 비평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대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선택했다는 쪽으로 얘기를 진행해보고자 해요.
이 경우엔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미츠하가 타키를 불러들인 걸까? "다음 생에는 도쿄의 꽃미남으로 살게 해 주세요"라는 미츠하의 욕망을 떠올려보면 말이죠. 생각해 보니 타키는 거친 소년처럼 묘사되지만 그 묘사는 전부 간접적입니다. 타키의 볼에 붙은 반창고, 타키의 행실에 대한 이런저런 증언, 그리고 미츠하로서의 타키가 실행에 옮기는 거친 행동들. 사실 이것들이 타키를 위한 게 아니라 미츠하를 위한 거라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미츠하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라면 말이에요. 타키가 되고 싶은 미츠하뿐만 아니라, 미츠하의 삶에 뛰어들어 그의 삶을 바꿔야 하는 타키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미츠하의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사실 미츠하가 진정한 한 명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예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지는 그냥 잘 생긴 거 한 번이라도 더 보고 가시라고...
9월 8일 ~
웹진 《채널예스》에서 칼럼 <써야지 뭐 어떡해>의 연재를 시작했다. 《채널예스》 측의 협조 덕분에 최근 공개된 '작업'들을 자유롭게 혹은 마구잡이로 오가며 글을 쓰고 있으며, (두 편의 연말 독서 결산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다룬 것들만 열거하자면 영화(<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연구서(『망설이는 사랑』), 소설(『나의 친구들』), 만화(『던전밥』), 애니메이션(<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이 있다.
꽤 신기한 타이밍으로, 올 3월에 작고한 영화감독 이강현에 대해 얘기 나눌 자리를 불과 일주일 텀을 두고 한 번씩 가졌다. 한 번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다른 1990년대생 영화평론가들과 함께 "우리 세대에게 이강현은 어떤 작가인가?"라는 제목의 대담으로, 다른 한 번은 대구 오오극장에서 진행한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 "지금의 독립영화라는 건"의 시네토크로. 둘 다 <파산의 기술> 상영 직후 진행됐다. (둘 다 섭외 계기는 팟캐스트 카페크리틱의 <보라> 특집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두 자리 중 어디에서도 해야 할 말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령 전자에선 도저히 묶일 수 없는 필자들이 이렇게 "90년대생"으로 묶여서 '독립 다큐멘터리'를 위해 호명된다는 게 얼마나 기이한 일이며 또 90년대생들이 이강현의 영화에 대해 과연 얼마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 없던 것에 약간 우울해졌었다.
"그렇다면 이런 몽타주가 유추냐 연결이냐, 라고 묻는 건 사실 어느 정도 잘못된 질문이겠죠. 유추는 서로 별개인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상상하거나 짐작하는 일이고, 연결은 서로 별개인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거나 잇는 일이잖아요? 이강현의 영화는 둘 중 하나를 하진 않죠. 저는 이를 차라리 의심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 혹은 저 혹은 그 이미지가 그 자체로는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어 절대적이진 않다는 걸 보여주는 의심의 몽타주 말입니다."
"지난주의 대담에서 김병규 평론가께선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가본 적 없는 곳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예, 물론 그렇죠. 그렇지만, 그건 이강현의 지도 그리기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김병규 평론가께서 말씀하신 건 야심 찬 모험가적인 지도 그리기에 해당하는 얘기인 것 같고요, 이강현의 지도 그리기란 오늘날에 더 일반적인 지도 그리기, 말하자면 오히려 가본 곳을 매번 새로 가고 새로 더듬어보려는 일이라고 생각돼요. 가령, 여러분도 종종 길거리 한복판에서 레벨기를 갖고 작업하는 측량기사를 본 적이 았을 겁니다. 그곳이 지도에 그려진 적이 없어서 그가 그 작업을 하는 걸까요? 아니거든요. 그 사이에 이 길거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난감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의심의 감각과 닮아있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나중에 만들어진 <얼굴들>에서 김새벽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가 마지막에 "이제 안 다녀본 곳들을 가볼 거야"라고 했을 때, 저는 그 말이 지도(가 기록할 수 없는) 밖으로 나가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세계를 매번 새로이 경험해 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9월 26일
소설가 박솔뫼의 추천 덕분에, 스즈키 이즈미의 근사하고 기기묘묘한 소설 및 에세이들을 묶은 선집 『여자와 여자의 세상』을 미리 읽고서 (소설가 이미상과 더불어) 추천사를 썼다. 소설도 퍽 흥미롭지만 그보다 에세이가 훨씬 더 재밌다.
"나답게 산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여러분은 아마 자연스레 이런 질문으로 이끌릴 것이다.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괴리된 (혹은 괴리됐다 느끼는) 이들의 강박과 불안을 집요히 파고들며, 스즈키 이즈미는 메마른 어투로 하지만 몹시 뜨겁게 증언한다. 나답게 산다는 건 참으로 고되고, 피로하고, 파괴적이며, 나아가 불확정적인 일이라는 걸 말이다."
10월부터 11월까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 비평 모임을 기획 및 진행했다. 제목은 <오카자키의 뒷모습>으로, 출간이 임박했던 『치와와』를 비롯해 지금껏 쪽프레스에서 출간한 오카자키의 주요작들을 함께 읽고 그에 대한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며 토론하는 북클럽이었다. 오카자키가 한국에서 언급만 많이 되고 '말'해지지는 않는다고 느꼈던지라, 멤버들의 열의는 나를 적잖이 고무되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내기 발표한 발제문 중 몇 편은 곧 다른 루트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니 기다려주시라.
10월 15일
《마리끌레르》 10월호의 "My Scene"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이 올해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 속 장면 하나를 소개하는 기획이었는데, 나는 여기에 사적인 한탄과 함께 <호남호녀>의 마지막 장면을 얘기했다.허우샤오시엔이 알츠하이머로 은퇴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올해는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만화나 연구서를 읽는 데 시간을 더 할애한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보다는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진 게 더 크다. 어머니는 올해 내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병원비는 가족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은 이제 생사도 알 수 없게 됐다. 죽거나 크게 다친 지인들이 있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사건들도 여럿 겪고 있다. 나는 살아가는 게 버겁게,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이 와중에 대체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우울이 아니라 순전한 의문으로, 나는 자꾸 자문하게 된다. 그 때문일까? 죽음을 품은 채 계속되는 삶을 그린 영화들에 유독 끌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이 지면에 어울리는 건 역시 〈호남호녀〉 속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면일 것 같다."
사진엔 11월 15일로 적혀있으나 사실 저 날은 정지혜 평론가가 앞서 <열정>의 씨네토크를 진행한 날이었다.
11월 24일
수원시미디어센터에서 기획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전에서 (마지막 날의 마지막 상영이었던) <드라이브 마이 카> 상영 직후 (팟캐스트 카페크리틱의 리더이기도 하신) 홍은화 평론가와 함께 시네토크를 진행했다. 시간 관계상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생각된 세 가지 장면에 대해 우리 둘이 만담 스타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질문 시간에 관객들이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해 준 덕분에 적잖이 치열한 자리가 되었다. 어떤 관객분은 시네토크가 끝난 이후 센터장님께 "내가 이런 걸 공짜로 들어도 되는 건가 몰라"라고 말했다는데, 그날의 모든 고생이 녹아 사라지는 듯이 감동적이었다.
친구가 만들어준 짤이다
12월 2일
MBC의 옴부즈맨 프로그램 <탐나는 TV>에 출연했다. 참고로 <드라이브 마이 카> 시네토크와 같은 날에 녹화를 했다. 녹화에 잘 임하지 못했기에 떠올리기만 해도 우울해진다...
12월 6일
《릿터》45호의 커버스토리는 "워크숍 시대"인데, 나는 여기에 「자유로운 파국 - 닉 드르나소의 『연기 수업』」이란 글로 참여했다. (『사브리나』로 순식간에 스타가 된) 닉 드르나소의 근작 『연기 수업』을 축 삼아, 동시대 예술에서 워크숍이 활용되는 방식을 약간 적나라하게 욕해보았다. 실명 및 구체적인 작품들을 거론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또한 곧 있어 닉 드르나소에 대해 얘기할 또 다른 자리가 있으니 기대해 주시길 바란다.
"동시대 미술에서 워크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나오는 건 아마 이런 이념 때문일 테다. 관계 미학의 시대가 한참 지났다고는 해도, 아마추어적이고 우연적이며, 유동적이고 ‘간격의 우정’이 감도는 잠깐의 공동체를 미학을 통해, 혹은 미학 안에서 조직해 보려는 열망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예술’의 가능성의 조건(Condition of Possibility)을 낱낱이 재고하고 해체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요즈음의 조류에서라면, 참여자 각각의 수행성을 극대화하려는 이념을 가진 워크숍은 당연히 적절한 형식일 수밖에 없다. 미술가들이 ‘작품’ 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파라큐레토리얼적’ 워크숍을 기획하고, 미술관에서 나날이 이런저런 학술적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건 이젠 정말 흔한 일이 되지 않았나?"
"『베벌리』, 『사브리나』, 그리고 이 『연기 수업』에 이르는 드르나소의 장편 만화들에서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각인되는 건, 역시 건조하며 모호하기 짝이 없는 특유의 화풍과 연출일 것이다. 3번째 수업이 끝난 이후인 130페이지에서 토머스가 인물화 수업용 누드 모델 일을 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걸어갈 때, 드르나소는 뜬금없이 토머스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의 단독 프레임을 삽입한다. 그리고 토마스의 칸과 그 여성의 칸을 정면 바스트 숏(인물의 머리부터 가슴까지를 포착하는 숏)으로 번갈아 제시한다. 이후 이 여성 캐릭터는 단 한 번도 재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이 장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이 우연히 눈을 마주친 걸까? 토머스가 이 여성에게 반한 걸까? 아니면 이젠 지나가는 아무개의 시선마저 그에겐 육중하게 느껴지는 걸까? 안 그래도 이리 불확실한 것을, 캐릭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정적인 얼굴 데포르메는 더더욱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한데 이렇게 ‘구분 불가능성의 형식’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자연스럽게 생략되는 지점이 있다. 대체 존이 무슨 짓을 했길래 참여자들이 이 정도로 허구와 실재를 혼동하는가? 적어도 직접 읽었던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존이 참여자들의 신에 종종 개입하기는 해도 마약이나 마법을 써 그들을 조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셉션〉이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풍수면! 꿈꾸는 세계 대돌격〉처럼 참여자들이 같은 허구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기계도 없다. 돌이켜보면 모든 참여자들이 파국을 상상하고 그리로 향하도록 존이 주도적으로 이끈 적도 없다. 게다가 3번째 수업에서 참여자들이 각각 자신만의 신을 상상할 때 존이 하는 일이라곤 오직 멍 때리기뿐이다! 이 수업이 실질적으로 워크숍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인 게다. 존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도통 나올 생각이 없다."
12월 7일
조던 카스트로의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첫 장편소설 『노블리스트』에 추천사를 썼다. 내가 추천사를 맡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재밌는 소설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재밌다고 홍보를 하고 있다. 내 생각에 카스트로는 포스트 인터넷 상황에서 몸짓의 위상이 어찌 변하고 있는지를 몹시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곧 작은 자리를 가질 예정이니 또다시 기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소설은 근사하다. 혹은 산만하고, 공허하고, 추접스럽고, 찰찰하고, 신경질적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은 『노블리스트』안에서 새로운 힘을 갖는다. 동시대 문학 지형에 걸맞은 크리티컬 할 작품이라 하겠다."
<포수>(2022) 中
12월 12일
올해 <포수>로 DMZ영화제 한국경쟁 단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양지훈 작가가 상업화랑 을지로에서 영상 작업 3편과 함께 첫 개인전 <다르게 총 쏘기>를 개최했(으며 12월 31일까지 계속된)다. 나는 그의 사진 작업들까지 염두에 둔 작가론 성격의 짧은 비평 「만약 우리의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다면」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물론 이번 전시에 설치된 작업들이 걸작이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작업들이 '불순한' 역사서술의 미래를 충분히 기대하게끔 만든다는 것은 힘주어 얘기하고 싶다.
"양서옥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포수〉에서, 우리는 맨 처음과 마지막에 그가 4.3 때 얘기는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정작 그 사이의 러닝타임을 채우는 건 대부분 그의 4.3 때 경험담이지만, 한편으론 여러 노이즈들이 종종 끼어들어 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카메라 노출값을 조절하는 게 선명히 보이는 화면, 양지훈 자신 혹은 개가 의도치 않게 말을 가로막는 순간, 다소 뜬금없이 또 번잡하게 끼어드는 인서트 컷… 양지훈은 “할아버지 말을 정확히 들었다가 이걸 증명할 수 있어야 돼.”라는 양서옥의 주문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 미묘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대답을 구한다. 사담이 길게 나오기 시작하자 편집점이 눈에 띄게 연출되더니 곧 양지훈이 직접 그에게 주문한다. “할아버지, 4.3 때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그리고 이어지는 거절. 앞서 말했듯 이런 거절은 맨 처음과 마지막에 수미상관처럼 배치되어 있다. 이쯤에서 피어오르는 외설적인 상상. 어쩌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나온 줄 알았던 양서옥의 경험담은 모두 이런 주문의 반복 속에서 겨우겨우 나왔던 건 아닐까? 즉 그의 경험담은 투명하게 기술된 게 아니라, 계속 양지훈에 의해 어느 정도 매개되었던 게 아닐까? 양서옥의 발화를 방해하던 노이즈들은 이 지점에서 달리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와 우리 사이의 매개 속에서 발생한 시차를 폭로하려는 제스쳐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