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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Sep 28. 2023

만화와 불가능한 만남 - 『러스티 브라운』에 대하여


(아래는 2023년 4월 3일 문학실험실의 문학전문지 《쓺》 제16호에 수록되었던 원고를 일부 수정 및 보완한 글이다.)







나 자신의 본모습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느라 항상 바빴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나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모든 나를 전부 가지는 건 불가능했다.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피아의 재앙」




(맨 처음의 공간 소개를 제외한다면) 양 페이지를 가득 채운 눈의 결정들에서 『러스티 브라운(Rusty Brown)』은 시작하고 끝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끝 대신 막간(Intermission)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것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저자인 크리스 웨어의 첫 장편이자 출세작인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Jimmy Corrigan, the Smartest Kid on Earth)』(이하 『지미 코리건』)의 마지막 장면에 휘날리던 그 눈 말이다. (안 봤어도 그러려니 해주시라) 거기서도 눈발은 양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은 것 마냥 바깥의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치우면서.


그런데 이 눈발(들)은 과연 어디서 내리고 있는 걸까? 일단 ‘미국 어딘가’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배경이 하나도 그려지지 않아 언제 어디서 휘날리는지 알 수 없는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한참 부족한 대답으로 느껴진다. 심지어는 눈이 쌓이고 있을 바닥조차도 우리의 시야에 없지 않은가? 여기에는 바닥이 없을지 모른다. 이 기묘함, 이 추상성. 이런 광경은 크리스 웨어의 만화에 대하여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펼쳐지는 모든 사건은 그저 하나의 눈발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달리 말해, 크리스 웨어에게 눈은 사건들을 포괄하고 또 가능케 하는 어떤 광활한 바탕의 지표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명확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빌딩 이야기(Building Stories)』에서 이름 모를 여자 주인공이 시카고 시내를 코트도 없이 배회할 때 휘날리는 눈발은 일순 그가 속한 시간의 관절을 통째로 탈구시키는 듯하다) 물론 이 말은 주의 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러스티 브라운』에서 사건들이 하나의 바탕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하려면, 그 이전에 사건들이 하나의 바탕에서 펼쳐지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만남



전설적인 시트콤 〈사인펠드(Seinfeld)〉의 클리셰라 할 장면 패턴을 이쯤에서 (마구잡이로 재구성해) 떠올려본다. 주인공 4인방은 늘 그렇듯 몽크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어, 제리가 새로 사귀는 여자친구에 대한 불만을 한참 늘어놓는다. 그럼 가만히 있던 조지가 자기 부모님과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하고, 그걸 듣던 일레인은 대뜸 자기 직장 상사 욕을 시작한다. 한 마디로, 다들 딴 소리만 늘어놓는다. 분명 같은 공간에 모여 만나고 있음에도 주인공들은 서로 완전히 엇갈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패턴의 만남은 우리네 일상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꼭 〈사인펠드〉의 주인공들처럼 이기적이고 잔혹해서 그런 건 아닐 터이다. (같은 말이지만, 여기서 ‘타자’나 ‘공감(능력)’을 섣불리 거론해선 안 된다) 같은 말도 다른 의미로 발화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상상을 떠올리기도 하며, 하나의 상황을 완전히 달리 이해하고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만남의 순간에서 문제란 서로의 현실 감각이 너무나 상이하다는 데 있다. 성격부터 종(種)에 이르는 다종다기한 맥락에 의해 (과잉)결정되는 현실 감각. 달리 말해 ‘현존재(Dasein)’로서 우리의 한계.


그렇기에 같은 곳에 있다고 한들 우리는 ‘우리’로서 뒤섞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내포하는 만남을 여전히 태연하게 만남이라 불러도 괜찮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질문은 ‘진실한’ 만남이 도래하기만을 한탄과 함께 기다리는 과도한 순수주의적 태도의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니 좀 더 분명히 하자면, 여기에서 질문은 현상으로서의 만남에 한계가 늘 통주저음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모든 만남은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만남으로서, 이상과 조건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협상 속에서 기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림 1]


만화가로서 크리스 웨어가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불가능한 만남이다. 돌이켜보면 초기작인 『큄비 더 마우스(Quimby the Mouse)』에서부터 어느 정도 드러났었지만, 『러스티 브라운』에서도 웨어는 불가능한 만남의 모티프를 유별날 만큼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몇 가지 예시. 슈퍼 청력을 얻었다는 생각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러스티 브라운은 학교 복도에서 조던 린트 패거리를 마주치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작품의 첫 파트에서 브라운 일가로부터 시작되는 (페이지 중심에 위치한) 메인 플롯과 화이트 남매의 (페이지 아래에 조그맣게 위치한) 서브 플롯은 끝까지 하나의 관점으로 회수되지 않는다. 우디 브라운의 파트 후반부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우디의 시점은 부서진 안경 때문에 계속 (마치 고장난 브라운관 TV의 화면처럼) 흐릿한 이미지로 제시된다. 조앤 콜먼은 1919년 오마하 폭동을 다룬 신문 기사의 사진 속에서 린치에 참여한 백인 남자들의 (윤곽만 겨우 보이는) 얼굴을 응시, 아니 대면한다.[그림 1]


불편한 만남부터 공존 자체를 확신할 수 없는 만남까지, 이렇게 ‘반복’되는 불가능한 만남은 『러스티 브라운』을 삶의 실패로 가득 찬 작품으로 만든다. 어떤 실패? 자기를 제대로 구성하는 것에 대한 실패. 실수로 깨버린 유리병도 여하간 내 책임이 되듯, (슈퍼걸 인형을 학교 책상 서랍에 두고 온 러스티처럼) 자아는 행동을 놓치고 (자식을 학대한 사실을 잊어버린 ‘듯한’ 조던처럼) 삶은 기억을 놓친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룬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외양이 바뀌는 조던이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들 역시도 의미심장해진다) 그 점에서 웨어의 멜랑콜리는 단지 행위의 실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의 필연적인 실패에서 오는 것이다. 『러스티 브라운』의 캐릭터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상한 자신의 상에 일상적으로 실패하고 소외된다. 데이빗 M. 볼이 말한 웨어의 “실패의 수사학”(rhetoric of failure), 말하자면 자기의 철저한 훼손.


하지만 실패와 소외를 겪는 게 과연 캐릭터들 뿐일까? “실패의 수사학”을 논할 때 볼이 발견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그래픽 노블’의 애매한 위상 속에서 진행되는 모종의 협상, 곧 (자크 랑시에르가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논했던 것과 유사한) 만화에 있어 ‘영웅적 실패’의 기제이자 알레고리로서의 실패다. 몹시 근사하고 또 중요한 독해가 아닐 수 없지만, 그럼에도 웨어의 “실패의 수사학”에는 좀 더 밀어붙일 여지가 남아있다고 나는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러스티 브라운> 출간 직후 웨어가 위프레젠트(wePresent)와 진행한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중 다음의 대목을 곱씹어본다.


제가 가진 내러티브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그림이 나타나는 현실에 뒷전으로 밀려나며, 이미지는 항상 저보다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책은 그 자신의 삶을 갖고, 나쁜 책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위해 비틀리고 씨름하고 구부러지면서 모양이 만들어지죠.


오해의 여지가 있긴 하나, 크리스 웨어는 이미지의 맹목적인 사도가 아니다.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가 미학의 전부를 결정한다는 식의 논리는 웨어의 만화의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지미 코리건』 이래 그의 서사는 당대의 어떤 미국 소설보다도 토니 모리슨이나 필립 로스 등 1930년대생 소설가들이 일군 20세기 후반 미국소설의 계보를 잇는 데 충실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이미지와 책이 모종의 의식을 지닌 개체인 것 마냥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한 비유적 수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곧 객체에의 생기적 인식으로 이 말을 이해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 『러스티 브라운』이 자기(self)가 철저히 훼손당하는 광경을 제시한다고 할 때의 자기란 한편으로는 러스티, 우디, 조던, 조앤 등의 캐릭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면과 작품을 이루는 각각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본 것(혹은 볼 것)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성싶다.


웅성거림


즉각적인 인상에서 허심탄회하게 시작해보자. (크리스 웨어의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러스티 브라운』은 참 난해하다. 읽기가 어렵다. 일반 독자든 전문적인 연구자든 간에 이는 부정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사실일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난해함을 젠체하듯이 모른 척하거나 단점으로 지적하는 대신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 지를 좀 더 숙고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만화는 (모더니즘 문학처럼) 어마어마한 사전 지식을 필히 요구하는 작업도 아니고 (확장 영화나 추상 만화처럼) 드라마적 내러티브를 벗어난 ‘서사’를 추구하는 작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러스티 브라운』은 말 그대로 읽기 어렵다. 왜 그런가? 웅성거림의 배치(Assemblage)로 인해.


[그림 2]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현실과 상상, 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명시적인 계기 없이 오가거나, 유사한 구도의 칸 몇 개를 다닥다닥 붙여 놓거나, 페이지에 비해 칸이나 글씨의 크기를 너무 작게 만들어 그 내용을 살펴보기 어렵게 만들거나, 하나의 칸 다음에 어떤 칸을 보아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빽빽하고 장황하게 칸을 배열하거나[그림 2], 캐릭터의 말을 홈통에 잔뜩 밀어 넣거나... 달리 말해 말이, 연상(聯想)이, 타임라인이, 사물이, 곧 이미지들이 제멋대로 앞다투어 나오고 활동하며 두꺼운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웅성거리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묘사라기 보다 묘사의 유보에 더 가까우며, 바로 그렇게 독자들의 일상적인 독법을 곤란하게 만들고 나아가 위협한다.


그리고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웅성거림에 참여하는 기호와 이미지들 역시 위협을 당하고 자기를 훼손당한다. 하나 이때의 훼손이란 물리적 훼손이나 비형상화를 의미하지 않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잠시 우회할 필요가 있겠다. (크리스 웨어의 개인 잡지 《애크미 노블티 라이브러리(The ACME Novelty Library)》에서 연재될 때 발표되긴 했어도) 『러스티 브라운』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론 중 하나일 「상속성, 유사성, 일시성(transmission, ressemblances, impermanence)」에서 티에리 그로엔스틴은 캐릭터 사이의 공통점 -도상적인 닮음부터 그들이 겪는 사건의 비슷함까지- 이라는 모티프에서 출발해 조던 린트’들’ 사이의 차이, 상이한 시간대를 묘사하는 이미지들의 반복적인 구도를 검토하던 끝에 크리스 웨어의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결국 웨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불교적 관점에서) 존재와 사물의 영속성과 무상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변하고 동시에 모든 것이 남아 있다. 혹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말했듯이, 변화를 제외하고는 영원한 것은 없다. (…) 만화가에게는 정체성과 자기 유사성의 개념을 비난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단순히 그래픽 코드의 구성을 변경하는 게 그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나카가미 겐지의 소설에서 발견했던 ‘반복’, 곧 개체의 고유성을 소진시키는 방법으로서 반복의 레토릭화("자신이 하고 있는 짓은 지금껏 혐오하고 증오해왔던 친아버지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혹은 반복 이외에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카가미 겐지의 '반복'의 자각은 단지 이 시점에서 생겨나고 있다. [...] 반복에 대한 자각이 없는 자야 말로 반복을 행하고 만다.", 『역사와 반복』)와 정확히 같은 것을 그로엔스틴은 웨어에게서 “정체성과 자기 유사성의 개념을 비난하는 간단한 방법”이라는 표현으로써 발견하고 있다. 그로엔스틴 자신은 이를 만화의 일반적 문제에 접속시키는 데서 적당히 글을 멈추지만(“아마도, 영속성과 무상함에 대한 모든 내러티브적 변형은 결국 [만화 언어의 특수성이 발현되는] 이 기본 과정을 은유할 뿐이다.”), 기왕에 그가 말을 꺼냈으니 『러스티 브라운』을 읽은 (혹은 읽을) 우리들은 그의 통찰을 주어진 주장보다 더 밀고 나가도 좋지 않을까? 우리는 웅성거림에 관해 논하던 참이었다.


[그림 3]
[그림 4]


<러스티 브라운>에서 이미지가 몹시 이상하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을 당신께서도 적지 않게 느꼈을 것이다. 가령 학교 복도 속의 앨리스를 보여주는 78 페이지[그림 3]에서, 딱딱하고 냉정해 보일 만큼 명료한 선(Clear Line)으로 세밀하게 이루어진 공간은 그 구상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이고 대칭적인 배열로 인해 (마치 로이 릭턴슈타인이나 앤디 워홀의 회화처럼) 미묘한 추상성을 띄게 된다. (웨어의 만화들이 건축학과 수업에 교보재로 쓰이기도 했다는 걸 여기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 심각하게는, 곧바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조그맣고 무수히 많은 칸들을 뭉뚱그려 놓은 177 페이지[그림 4]에서 독자는 만화의 모든 칸을 꼼꼼히 볼 필요를 다름아닌 작품에 의해 부정당한다. 역설적이게도, 웨어의 편집증적인 작업은 모든 칸에 세밀한 묘사의 그림을 채우는 동시에 그 어떤 칸의 내용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도록 칸들을 최대한 어수선하게 배열하는 이중의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역시도 웅성거림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이다.


이미지를 (추상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웅성거림이다. 웅성거림은 칸을 포함한 이미지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관념의 영역에서 이미지의 윤곽을 폭력적으로 뭉개고 번지게 해 이미지를 이루는 감각이 작품 전체의 다른 감각들과 난잡하게 뒤엉키는 기묘한 광경을 만든다. 그 속에서 이미지는 여전히 모종의 의미론적 기호이긴 하지만 마냥 그런 기호일 수만도 없게 된다. 즉 기호이자 감각의 덩어리로서 진동하는 이미지.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러스티 브라운』에서 크리스 웨어가 훼손하는 자기란 다름아니라 만화에 있어 (칸을 포함한)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단독적인 표현이라는 ‘그럴듯한’ 전제일 터이며, 또한 이미지들의 훼손은 이미지들을 매개하는 간격 속에서만 발생하고 작용할 것이다.


우디의 파트에선 칸의 의미론적 기능을 (다른 칸과의 도상적 유사성을 통해) 유보시키거나 ([그림 4]처럼) 흐트러트리고, 조던의 파트에선 (캐릭터가 일생에서 갖는 다양한 모습과 성격과 인식법을 차례대로 배치해) 만화적 캐릭터의 조건을 낱낱이 해체하고, 조앤의 파트에선 (혼란스럽게 뒤섞인 타임라인을 통해) 캐릭터에 대한 만화의 시간성을 문제시하고 있듯이, 『러스티 브라운』을 이루는 거의 모든 칸에는 오토 랑크가 말한 ‘현대적 더블’ 즉 홀로일 때에도 결코 홀로일 수 없다는 신경증적 불안이 내재한다. 괴팍하고 희유한 관계론자로서의 웨어. 그래, 나는 질 들뢰즈라면 ‘경련’이라 불렀을 상태를 여기서 웅성거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그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엄밀히 말해 신체는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다린다. 내 신체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 신체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 한마디로 일종의 경련이다. 신체는 신경 그물과 같고, 그의 노력이나 기다림은 경련과도 같다. (『감각의 논리』)” 신체, 곧 이미지.


다시 한 번 웅성거림에 귀 기울여 보자. 이 소리가 사실 ‘무언가’가 되려 하(며 또 실패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이미지들의 비명이라는 게 이제는 분명히 들릴 것이다. 허면 웨어는 무엇 때문에 이런 웅성거림을 연출해야 했는가? 『러스티 브라운』에서 이미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훼손하게끔 만든 그의 문제의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크리스 웨어는 대체 무엇에 대해 이토록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그로엔스틴의 통찰을 밀어붙여,) 『러스티 브라운』의 웅성거림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궁여지책으로 만화라 불리우는 모종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가설. 웨어는 그 가설을 은페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당대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테크놀로지로서 코믹스


산문 픽션으로서의 소설을 “서사성과 복합성 사이의 분열된”, “극도로 양극화된 형식”이라 명확히 정의 내린 사람은 프랑코 모레티다. 그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면,


산문은 선물이 아니라 노동이다. [......] 즉, 종속 구문은 노력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그것은 예지, 기억, 수단과 목적의 합치를 필요로 한다-정말로 생산적이기도 하다. 즉, 그 결과는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다. 왜냐하면 종속절은 절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의미는 분절적이 되며, 전에 존재하지 않던 양상들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바로 복합성이 생겨나는 방식이다.
(프랑코 모레티, 「소설」, 『멀리서 읽기』)


산문의 생산성이라. 구절과 구절, 문장과 문장, 이미지와 이미지가 “상이한 박자부호”(제임스 우드)로서,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수준으로 서로에게 촘촘히 엮여 간섭하는 형태의 픽션적 구성을 가능케 하고 또 그런 구성을 대중이 적당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정련한 것은 물론 근대 소설의 위대한 (그리고 양가적인) 성취이다. 모레티는 수십년간 지치지도 않고 이런 상태를 묘사한다. 그런데 앞의 말은 약간 바꿔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대 이후 소설은 “서사성과 복합성 사이”에서 언어가 겪는 분열증의 다양한 양상을 인간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니까, 소설은 특정한 감각적 인식법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아닌)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하나였다는 게다.


허면 만화는? 앞선 문단의 설명은 사실 20세기에 이르러 코믹스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매체(Medium)로 인식/성립된 만화에도 거의 겹쳐 놓을 수 있다. 이 이미지와 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는 게 우리들의 기본적인 만화 독법이라는 전제가 통째로 흔들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원조인 윌 아이스너의 의도를 벗어나 서점용 카테고리가 된 캐치프레이즈인 ‘그래픽 노블‘은 여전히 어느 정도 유효한 개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주의하자, (많은 ‘문학주의자’들의 여전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비롯한 문학적 언어 체계에서 출발한다는 게 꼭 만화가 거기에 속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구조화에 있어 만화는 적어도 일반적 형태의 소설에 비해 더 혼탁하게 양극화되어 있다.


「만화라는 이상한 관계」라는 글에서 나는 “하나의 물리적인 기술적 지지체 위에 한꺼번에 등재된 대상’들’ 사이에 작동하는 (순서)서술성과 (다발)이미지성 간의 (종종 연합이 되기도 하는) 대결”이야말로 만화의 매커니즘이라고 (거칠게) 주장한 적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만화책의 페이지 혹은 디바이스에서 한 캐릭터가 다양한 모습으로 한꺼번에 나타날 때 우리는 순차적인 시간과 정체된(혹은 동시다발적인) 시간을 동시에, 하지만 경우에 따라 다른 강도로 느낀다. 그 광경에 칸이 그려지지 않았거나, (던컨 스틸이 논한) 건축 만화(Archi Comics)처럼 다이어그램에 가까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경우라도 그러하다. (허면 서술성을 고도로 억제하거나 교란시키는 추상만화의 경우는? 이에 대해선 좀 더 엄밀한 논증이 필요하나, 본 기획[《쓺》 16호의 “만화 영역의 확장” 부문 - 저자 주]에 함께 참여한 오혁진이 나를 대신하여 잘 설명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적 인식법에 대한 근대적 ‘테크놀로지’로서의 만화에게 주어진 ‘정신적인’ 역할이란 다름아니라 게오르그 짐멜이 “대도시적 삶의 형식”이라 부른 것, 사물과 자극이 도처에 넘쳐흐르고 시간성은 표준화되는 동시에 분열되는 근현대적 ‘환경’을 엄연한 세계상으로 승인하기를 사람들에게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상으로서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의 인식 능력을 훈련시키는 것이었을 테다. 순간을 다룬 듯한 정지된 이미지에도 복수의 시간을 겹칠 수 있으며, 개성적인 캐릭터를 조형하는데 아주 유용하지만 동시에 그런 캐릭터의 단독성을 근본적으로 산란시키는 만화의 변증법적인 잠재성을 통해. 같은 ‘몽타주의 시대’를 지나오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긴 했으나, 만화는 사진이나 영화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시간의 소외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즉 (닐 콘이 「만화에 대한 당신의 두뇌(Your Brain on Comics: A Cognitive Model of Visual Narrative Comprehension)」에서 논한 바를 제멋대로 요약하자면) 미시적 사건의 언표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공간적 구조에서 (통합이 아닌) 종합할 수 있는 다종다기한 인식적 “협상” 방법을 만화는 생산해온 것이다.


[그림 5], 『크레이지 캣』


돌이켜보면 조지 해리먼의 『크레이지 캣(Krazy Kat)』, 프랭크 킹의 『가솔린 앨리(Gasoline Alley)』, 클리프 스터렛의 『폴리와 친구들(Polly and Her Pals)』과 같은 선조격의 (‘초현실주의적’인) 미국 만화들에서 따로 또 같이 흘러나온 것은 바로 만화의 이런 역할에 대한 희망찬 가설이었다. 캐릭터를 소외시킬 정도로 끊임없이 유동화되고 파편화되는 허구적 세계[그림 5]를 일찍이 만들어낸 이 위대한 만화가들은, 어쩌면 만화가 세계를 긍정할 새로운 인식 능력을 생산하고 훈련시키는 ‘테크놀로지’일 수 있으리란 가설을 타진하고 증명하고 급진화하는 데에 일찍이 전념했던 게 아닐까? (대니얼 래번의 책에도 쓰여 있지만, 웨어가 이들을 유독 사숙한다는 사실은 퍽 유명하다) 증명할 수 없을 뿐 더러 그들이 의식적으로 향한 길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만, 이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상상을 굳이 억누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역할이 완전히 만개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라 부른) 표준화로서의 내러티브의 시대를 관통한 만화는 근현대적 ‘환경’에 대한 감각을 체화하되 그것을 동일성에 대한 인식으로 다시 통합하도록 무의식을 적당히 길들이는 역할 역시 떠안아야 했다. 어떻게? 코믹스의 성립에 있어 캐리커쳐라는 형식이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 눈은 동그란 점으로 만들고 하늘과 땅은 칸을 가로지르는 선분으로 나누는, 대상의 단순한 시각적 코드화(데포르메)를 통하여. 다종다기한 이미지들이 만화로 유입되어 추상화와 구상화 사이의 긴장이 팽팽히 지속되는 와중에도, 이러한 코드화는 만화적 표현에 있어 웬만해선 힘을 잃지 않고 수행되었다.


물론 이 자체는 만화의 한계이지 실패는 아니(며 오히려 그런 한계에서 발생하는 만화 고유의 미적/정치적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그런 수행이 반복되면서 만화는 특정 개체의 성질을 시각적 코드로 환원하는 걸 넘어 그러한 코드에 개체의 성질을 통합시키는 일반성 생산의 근대적 ‘테크놀로지’가 되었다. 보편적인 만화의 캐릭터들이 과한 개성의 애티튜드, 패션, 제스쳐를 갖는 건 이 때문인 게다. 이렇게 쓰고 나니 만화의 출신 성분이 신문의 풍자화라는 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이 만화가 아닌 영화에서 ‘정신분산’과 ‘촉각적 수용’의 잠재성을 도출한 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의 시대의 독일에서는 신문에 짤막하게 실리는 단순한 코믹 스트립이 아직 보편적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오늘날은 어떤가?


세로 스크롤의 웹툰이든, 컷마다 옆으로 넘기는 컷툰이든, 이미지가 직접 움직이는 무빙툰이든 요즈음의 웬만한 디지털 환경의 만화들은 (제작, 유통, 감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인간이 이미지를 복잡성 없이 (재)생산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인식 능력을 달리 훈련시킬 계기가 분명 이런 만화들에도 잠재되어 있긴 하나, 보편적인 경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세기의 통합과도 달리 상이한 이미지들을 종합할 노력까지도 거의 필요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로 인해 디지털 환경의 만화는 자기 내지는 자아(ego)를 당연시하고 강화하려는 시도들에 스스로를 거의 내주게 되는 것이다. (인스타툰이나 ‘웹망생 만화’처럼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른바 ‘썰툰’의 계열을 떠올려보자) 요컨대 과도하게 통합하거나, 종합의 필요를 최소화하거나. 이런 당대의 힘 속에서, 당대의 힘을 직시하며 크리스 웨어는 저항을 이어간다.


주체


『단테』의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따라 말하건대, 캐릭터란 작품을 이루는 기호들의 합에서 주관적으로 추론된 동시에 그런 각각의 기호들이 작품의 서사를 이루게끔 뒷받침하는 특권적인 이중 작용의 ‘가상’이다(일반 언어에서 대명사가 쓰이는 방식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앞서 말했듯 만화는 “특정 개체의 성질을 시각적 코드로 환원하는 걸 넘어 그러한 코드에 개체의 성질을 통합시키는”, 곧 캐릭터의 성립을 이미지의 동일성의 문제로 치환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그것은 사진이 피사체를 ‘압축’하거나 1인칭 소설이 일련의 사건(들)을 ‘정련’하는 것과 같은 계열에서의 기능이었다.  


[그림 6]


허면 우리가 『러스티 브라운』의 인물들을 그 ‘다양한’ 모습과 웅성거림의 배치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캐릭터로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달리 말해, 만화를 볼 때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바로 '그것'으로 느끼게 되는가? 이는 크리스 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미스터리이기도 하지만, 『지미 코리건』에서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반복’이나 『빌딩 이야기』에서 세 페이지에 걸쳐 다이어그램으로 분석/해부되는(dissection) 주인공[그림 6]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사실 웨어 자신이 죽도록 골몰하고 있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러스티 브라운』이 만화의 사회적 기능을 한참 거스르는 작품이 되는 건 그 연장선에서다.


[그림 7]


웨어의 훼손은 단독적인 자기의 불가능함을 증언하려는 제스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훼손 속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걸 느끼지 않던가? 가령 조앤의 ‘다양한’ 얼굴이 유사한 구도의 컷으로 반복될 때를 떠올려보라([그림 7]). 여기서 우리는 모든 얼굴이 ‘그’(의 한 모습)이면서 그 어떤 얼굴도 (결정적인) ‘그’가 아니라는 동일성/정체성(Identity)의 역설과 맞닥뜨릴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얼굴을 아우르는 ‘그’의 삶과 존재가 있다는 걸 몹시 강하게 느끼게 된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타임라인은 그가 겪은 생애의 어떤 특정한 국면을 두드러지게 구현하는 대신 그의 생애 자체의 다성성을 통째로 구현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웨어의 훼손은 그 훼손의 과정에서만 도래할 자기, 말하자면 메타적인 자기를 위한 제스쳐라고 해야한다.


아니, 자기라는 표현이 이제는 여기에 영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외양과 성격의 변천사가 거의 겹치는 조던의 경우를 생각하면 정체성도 어딘가 모자라다. 고유명은 개체들 사이의 ‘반복’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영혼도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읽히거나 쓰일 여지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보수적 인간중심주의의 뉘앙스를 감수하고서 라도) 주체는 어떨까? 다만 이때의 주체란 (캐릭터와 비슷하게)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을 포함한 이런저런 관계들의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합이자, 이런저런 관계들이 새로 교차되고 창발하도록 만드는 가변적인 ‘가상’이란 걸 명확히 해야 할 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망각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기억 안에 간직되어 있”다고 할 때의 ‘우리’로서의 주체, 들뢰즈가 (칸트를 ‘제멋대로’ 독해하며) '균열된 나'(Je fêlé)라 부른 그 주체, 곧 존재론적인 혼종성과 위상학적인 수렴성이 서로를 전제하는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기계’로서의 주체 말이다. 이쯤에서 불가능한 만남으로 잠시 돌아갔다 와도 좋겠다.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룬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만화의 미스터리(‘만화를 볼 때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바로 그것으로 느끼게 되는가?’)와 주체의 미스터리(‘나는 어디까지 나의 것으로 책임져야 하는가?’)는 정도(程度)의 문제라는 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지 않은가? 상이한 이미지들은 각자로서 이미 무엇이면서 동시에 아직 무엇이 아니다. 달리 말해, 각자가 물적으로 무엇을 표상하고 있으며 그 표상은 이미지들을 종합하려는 관념 속에서 나타나는 (아우어바흐-들뢰즈적 의미에서) 형상으로서 무엇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설 내지는 다중성을 철저히 인지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도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 주체를 표상할 순수하고도 결정적인 이미지를 찾으려는 건, 적어도 만화에 있어선 쓸모없을 뿐 더러 불가능한 짓에 가까울 터이다. 그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건 상이한 이미지들의 배치를 배치로서, 즉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상으로 느끼며 이미지들의 관계를 절합하거나 절단할 수 있는 급진적인 인식적 “협상” 방법을 고안하는 게 아닐까? 삶의 형상이란 온갖 웅성거림 속에서, 웅성거림을 힘껏 가로지를 때에 비로소 솟아오를 것이다. (이는 배달의 민족에서 ChatGPT에 이르는 동시대의 ‘편리한’ 객체들이 인간의 주체성에 있어 증폭시키는 미스터리와도 공명한다 할 수 있을 테다)


이제는 납득이 갔을 지 모르겠다. 『러스티 브라운』에서 이미지들의 웅성거림을 연출해야 했던 것, 이미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훼손해야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테크놀로지’로서의 만화에 대한 은폐되고 불가능해진 가설을 당대의 것으로서 갱신하기 위해서인 게다. 여기서 (만화와 주체의) 형상이란 이미지들 간의 깊고 넓은 간격과,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연결을 조직하려는 이야기의 선과, 유추를 통해 그것을 종합하려는 독자의 생각 속에서 구성되며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각 파트의 주인공들이 저지른 어떤 과오는 그들의 파트가 아닌 다른 파트에서나 드러나지 않던가? 이것이 흔히 말하는 ‘라쇼몽 효과’라면, 그런 효과를 자아내는 주관성의 주체는 대체 누구일까)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말처럼 “예술에 대한 지각 혹은 예술에 대한 생각은 외재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 작품 그 자체의 부분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술 작품의 구성에 통합된다.”(『예술의 힘』) 웨어는 그런 “통합” 혹은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만화적 한계치의 조건과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가늠해보는 중이다.


『빌딩 이야기』에서 작품을 (읽어야 할 순서가 뚜렷이 기재되지 않은 14개의 ‘책’이라는 구성을 통해) 보드게임 세트처럼 만들어 확장된 몽타주의 만화적 가능성을 타진했던 웨어는, 『러스티 브라운』에선 (각각의 파트마다 각각의 세부적인 방법론으로) 독자가 ‘테크놀로지’로서의 만화와 맺은 인식적 “협상”들의 한계를 수면 위에 올려 그것을 처음부터 재구성하길 강건히 요구하고 있다. 현대 시에 대한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려, “이것은 언어활동의 파괴인 동시에 창조[…] 어휘들의 의미개념들의 파괴이며 침묵의 세계이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말을 찾고 있는 어휘”다. 이런 작업은 지금까지의 미국만화사(史) 전부를 통째로 뒤집어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감히 단언컨대, 『러스티 브라운』은 만화의 역사와 감히 대결하려 하는 (대작을 넘어선) 괴작이다. 대체 누가 이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 멀어져 길이 끊어질 수도 있으니 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크리스 웨어에게 눈은 사건들을 포괄하고 또 가능케 하는 어떤 광활한 바탕의 지표”라고 할 때 그 바탕이란 만화이기도 하고 우리네 세계이기도 하며 실은 둘 모두이기도 하다. 그래, 불가능한 만남과 함께, 하여튼 우리 모두 ‘오직 하나뿐인’ 현실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혹은 그렇기에 우리는 만나려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가며 또 그런 불가능함을 포괄하는 다른 만남의 형식을 발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욕망은 정말이지 끝이 없으니 말이다. 비록 그 시도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요할 수 있고(조앤의 경우), 끊임없이 실패해 파국을 몰고 오기도 하며(우디의 경우), 사실 궁극적인 목표도 불확실하곤 하지만(조던의 경우), 그렇다고 쉬이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욕망은 사실 의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러스티 브라운』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의 넘치는 감흥은 그 사실을 깨우침에 따른 반응에 다름 아니리라. 『러스티 브라운』과 함께 우리는 만화의 독자가 되는 법을 새로이, 거듭 새로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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