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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r 28. 2023

<러스티 브라운>은 21세기 최고의 만화다!!!


지난 번에 예고했듯, 문학실험실에서 내는 문학전문지 《쓺》 제16호의 작은 기획 부문의 '만화 영역의 확장과 ‘그래픽 노블’' 특집을 위해 「만화와 불가능한 만남 - 『러스티 브라운』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듯 이는 얼마 전 출판사 고트를 통하여 국내에 번역 출간된 크리스 웨어의 만화『러스티 브라운』에 대한 이른 평론으로, 본래 청탁을 받은 직후에는 크리스 웨어 작가론을 준비했으나 아무래도 분량상 문제가 될 듯 하여 『러스티 브라운』 한 편만 다루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처음에 약속된 분량을 아주 많이 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본고에서 나는 웨어가 집착하는 '불가능한 만남'의 모티프가 『러스티 브라운』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가에서 시작해 이 작품이 어째서 "지금까지의 미국만화사(史) 전부를 통째로 뒤집어보려는 (...) 괴작"인지 증명하고자 했다. 세계를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대할 것을 거듭 고집스레 요청하는 이 만화는, 단언컨대 현재진행형인 예술가가 만든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러스티 브라운』은 아주 다양한 관점에서 근하고 풀이할 수 있을 만큼 결이 두텁게 엮인 작품이어서, 이 글에선 한 가지 관점으로만 독해해보고자 했다. (또한 이 글은 지금까지 내가 발표한 두 편의 만화론 -「만화는 무엇을 잊고 있나?」와 「만화라는 이상한 관계」- 과 한편으론 느슨하게, 한편으론 직접적으로 연결되니 한 번쯤 참고삼아 읽어보시길 권한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다른 관점들은 아마 근시일 내에 여러분과 함께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러모로, 기대해주시라. 아래는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쪽프레스의 홈페이지 링크이다.  






"만화가로서 크리스 웨어가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불가능한 만남이다. 초기작인 『큄비 더 마우스』에서부터 어느 정도 드러났었지만, 『러스티 브라운』에서 웨어는 불가능한 만남의 모티브를 유별날 만큼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몇 가지 예시. 슈퍼 청력을 얻었다는 생각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러스티 브라운은 학교 복도에서 조던 린트 패거리를 마주치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작품의 첫 파트에서 브라운 일가에서 시작되는 (페이지 중심에 위치한) 메인 플롯과 화이트 남매의 (페이지 아래에 조그맣게 위치한) 서브 플롯은 하나의 관점에 회수되지 않는다. 조앤 콜먼은 1919년 오마하 폭동을 다룬 신문 기사의 사진 속에서 린치에 참여한 백인 남자들의 (윤곽만 겨우 보이는) 얼굴을 응시, 아니 대면한다. 불편한 만남부터 공존 자체를 확신할 수 없는 만남까지, 이렇게 ‘반복’되는 불가능한 만남은 『러스티 브라운』을 삶의 실패로 가득 찬 작품으로 만든다. 어떤 실패? 자기를 제대로 구성하는 것에 대한 실패."


"즉각적인 인상에서 허심탄회하게 시작해보자. (크리스 웨어의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러스티 브라운』은 참 난해하다. 읽기가 어렵다. 일반 독자든 전문적인 연구자든 간에 이는 부정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사실일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난해함을 젠체하듯이 모른 척하거나 단점으로 지적하는 대신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 지를 좀 더 숙고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만화는 (모더니즘 문학처럼) 어마어마한 사전 지식을 필히 요구하는 작업도 아니고 (확장 영화나 추상 만화처럼) 드라마적 내러티브를 벗어난 ‘서사’를 추구하는 작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러스티 브라운』은 말 그대로 읽기 어렵다. 왜 그런가? 웅성거림의 배치(Assemblage)로 인해."


"하지만 역사는 그런 역할이 완전히 만개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라 부른) 표준화로서의 내러티브의 시대를 관통한 만화는 근현대적 ‘환경’에 대한 감각을 체화하되 그것을 동일성에 대한 인식으로 다시 통합하도록 무의식을 적당히 길들이는 역할 역시 떠안아야 했다. 어떻게? 코믹스의 성립에 있어 캐리커쳐라는 형식이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 눈은 동그란 점으로 만들고 하늘과 땅은 칸을 가로지르는 선분으로 나누는, 대상의 단순한 시각적 코드화를 통하여. 다종다기한 이미지들이 만화로 유입되어 추상화와 구상화 사이의 긴장이 팽팽히 지속되는 와중에도, 이러한 코드화는 만화적 표현에 있어 웬만해선 힘을 잃지 않고 수행되었다."


"허면 우리가 『러스티 브라운』의 인물들을 그 ‘다양한’ 모습과 웅성거림의 배치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캐릭터로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달리 말해, 만화를 볼 때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바로 그것으로 느끼게 되는가? 이는 크리스 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미스터리이기도 하지만, 『지미 코리건』에서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반복’이나 『빌딩 이야기』에서 세 페이지에 걸쳐 다이어그램으로 분석/해부되는(dissection) 주인공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사실 웨어 자신이 죽도록 골몰하고 있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러스티 브라운』이 만화의 사회적 기능을 한참 거스르는 작품이 되는 건 그 연장선에서다. 웨어의 훼손은 단독적인 자기의 불가능함을 증언하려는 제스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훼손 속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걸 느끼지 않던가?"







작가의 이전글 <한밤중에 선과 악의 정원에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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