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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13. 2022

<러스티 브라운>, 어떤 웅성거림


(아래는 2023년 1월에 쪽프레스에서 출간 예정인 그래픽 노블 <러스티 브라운>의 프리뷰다. 또한 2023년 중에 발표될 <러스티 브라운> 비평문을 위한 티저이기도 하다.)




(맨 처음의 공간 소개를 제외한다면) 양 페이지를 가득 채운 눈의 결정들에서 『러스티 브라운』은 시작하고 끝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끝 대신 막간(Intermission)을 맞이한다. 어쩌면 이 눈은 저자인 크리스 웨어의 첫 장편 『지미 코리건』의 마지막 장면에 휘날리던 그 눈이 아닐까? 아쉽게도 확신할 수는 없다. 여러분이 만날 이야기가 눈의 결정들 사이에 존재하는 뒤틀린 시공간에서 펼쳐지며, 이 시공간을 우리가 만화라 부른다는 것만이 여기서 확실하다. 그리고 『러스티 브라운』 곳곳에 자욱한 멜랑콜리는 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무대는 일단 네브래스카의 조용한 도시 오마하의 1975년으로 설정되었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이는 무대라기보다 구심점에 가까운 것으로 변이한다. 군중극처럼 시작되어 우디, 조던, 조앤의 이야기들이 각자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뻗어나가는 플롯 구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공간들은 냉정해 보일 만큼 명료한 선(Clear Line)으로 빼곡히 이루어져 있고, 그 속을 오가는 캐릭터들은 일상적으로 삶의 실패를 겪는다. 어떤 실패? 자신을 제대로 구성하는 것의 실패. 실수로 깨버린 유리병도 여하간 내 책임이 되듯, 자아는 행동을 놓치고 삶은 기억을 놓친다. 『러스티 브라운』의 캐릭터들은 모두 이렇게, 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상상된 자신의 상에 있어 실패하고 소외된다. 그리고 늘 그러듯 크리스 웨어는 이런 삶의 패배자들을 우스꽝스럽고 냉혹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러스티 브라운』의 캐릭터들을 삶의 패배자로 만드는 게 그들을 둘러싼 폭력적인 미국의 삶 뿐일까? 이 작품에는 어떤 웅성거림이 있다. 시시각각 제멋대로 앞다투어 나오는 말이, 연상(聯想)이, 시간이, 사물이, 곧 이미지가 이 두꺼운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미친 듯이 웅성거린다. 눈과 머리를 멍멍하게 만들고도 남을 웅성거림은 여러분의 방향감각을 어그러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이 웅성거림은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이 아니다. 만에 하나 의식이랄 게 있다면 그 의식의 주체는 캐릭터가 아닌 만화 자체라고 해야 하리라. 마찬가지로, 웅성거림의 진동은 캐릭터들을 그 존재의 수준에서 떨게 한다. 그래, 이들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다름 아닌 만화의 삶이다. 


가령 일평생에 걸쳐 거치게 되는 수많은 얼굴과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던 린트가 하나의 캐릭터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혹은 조앤 콜의 다양한 얼굴이 같은 구도의 컷으로 반복될 때, 우리는 그 모든 얼굴이 ‘그’(의 한 모습)인 동시에 그 어떤 얼굴도 (결정적인) ‘그’가 아니라는 동일성(Identity)의 역설과 맞닥뜨린다. 나열되는 평범한 얼굴들의 틈새에서 만화는 격렬히 동요한다. 하나 크리스 웨어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작품에서 이야기와 만화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적 한계치를 실험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무언가’가 되려 하(며 또 실패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내지르는 비명, 그것이 『러스티 브라운』의 웅성거림인 것이다. 캐릭터들의 실패와 소외 그리고 멜랑콜리는 이 웅성거림이 작품의 모든 겹에 파급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당신도 나도 이런 괴물 같은 만화를 본 기억은 없다. 이 앞에서 지금까지의 미국 만화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책이 아직 파트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급히 오해하지는 않길 바란다.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그래픽노블’이라는 명명과 책의 두께에서 겁을 먹을 수 있겠지만, 『러스티 브라운』을 접하려는 독자가 이런저런 지식으로 철저히 준비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페이지마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기꺼이, 완전히 투신하려는 태도가 여기서 진정으로 필요하다. 뒤틀린 시공간으로서의 만화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때에야 어렴풋이 드러내리라. 가까스로 만화로 성립된 작품은 그렇게 가까스로 독자로 성립될 사람을, 곧 당신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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