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의 133호에 「<2차 송환>의 이물감을 논함」이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김동원 감독의 최신작인 다큐멘터리 <2차 송환>에 대한 리뷰로, 나는 여기서 오해를 사기 쉬운 <2차 송환>의 구성을 당대의 문제계, 혹은 글 속의 표현을 빌려 "역사의 주름" 속에 재맥락화해 작품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았다. 불편한 타자, 혹은 영화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려는 이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2차 송환>이라는 드물고 고귀한 '요청'이 우리 앞에 등장해 나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글을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송환> 보고 나보고 짓궂다는 사람도 있고, 포스트모던의 경향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는 이도 있어."라는 김동원 본인의 말을 볼 수 있었는데, 글에서 뚜렷하게 논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형식 수준에서의 경향은 <2차 송환>에서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은근히 감지되는 듯 하다. 말하자면 '둘로 나뉜 영화' 이후에의 모색이랄까? 사실 나는 한동안 다시 심해진 우울증으로 인해 극심한 난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몇 개의 청탁과 진행 중이던 작업을 거절 및 중단했었다.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된 이후 재활 치료라 생각하며 더듬더듬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글에 대해 아쉬움과 동시에 약간의 애착이 생긴다. 아래는 글의 링크다.
"당신이 나와 함께 새천년을 넘어온 사람이라면 Fucking U.S.A.라는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이른바 ‘안톤 오노 사건’의 여파에 편승해 대중적 반미 감정을 자극하고자 만들어진 이 노래는 내게 있어 (한일 월드컵 이상으로) 2002년을 기억하기 위한 주요 지표인데, 그것은 이 노래에 얽힌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2차 송환>은 어떤가? <송환>의 촬영이 끝난 직후이기 때문에 제작진과 장기수들은 이미 친밀하며 (원래 <2차 송환>의 연출을 맡았던) 공은주는 질문을 던질 때 프레임-인 해서 장기수들의 바로 옆에 앉기도 한다. 게다가 언젠가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이른바 ‘1호선 광인’ 중 하나인 김영식의 사연이 구구절절하게 펼쳐지니, 이 영화에는 더 이상 심리적인 간극이란 없을 것만 같다. 한데 이상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오히려 이 노인들과 우리 사이의 넓은 간극이 더더욱 느껴진다. 어째서? <송환>에서 드문드문 제시되던 이야기들이 <2차 송환>에서는 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조선 인민’으로서 그들의 삶."
"당연하지만 ‘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은 ‘그 시대의 존재들은 사라졌다’는 말과 온전히 포개어지지 않는다. ‘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정확히 지시하는 바는 어떤 존재들이 서로와 맺던 관계 방식의 변화이다. 설령 어떤 존재들이 가시화되고 중요시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고 해도 그 존재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을 수 있)으며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와 어떤 관계의 대상은 아닌 것. (사변적 실재론에서 얻어갈 ‘사회적’ 교훈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이 자리의 맥락에서 그것은 잉여다. 구조의 외상적 실재(the real)도 아닌, 그저 역사의 주름 속에 접혔거나 그럴 위험에 처해있는 잉여 말이다. <2차 송환>은 그런 잉여가 된 문제와 존재를 우둔할 만큼 가감 없이, 그것의 이물감까지도 통째로 제시하고 있다."
"<2차 송환>을 한 편의 영화이기 이전에 몽타주를 이뤄 영화가 되고자 하는 파편들의 모음으로 바라본다면, 영화 속의 삶을 대면하고 가로질러 (영화와 역사 양쪽에서) 몽타주가 성립되도록 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관객인 것이다. 이는 법정의 배심원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는 영화로 만난 잉여들을 하나의 ‘평면’에서 살아가는 동지로 삼는 연대다. 그렇다고 <2차 송환>이 Fucking U.S.A.가 울려 퍼지던 2002년의 재림을 촉구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또한 장기수들의 일상적 몸짓에서 게스투스를 촉발시키거나 그들의 존재 자체에 결부된 정치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2차 송환>은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