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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09. 2022

<다섯 번째 흉추>, 영화의 기쁨과 불안


(아래는 9월자 인디포럼 월례비행의 <다섯 번째 흉추> 특집을 위해 작성했던 짤막한 리뷰이다.)




매트리스를 하나의 장소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몸을 편히 뉘이기 위한 물건을 넘어서, 누군가의 경험 그리고 나아가 삶이 축적되고 생성될 수 있는 장소말이다. 물론 상식적으론 어림없는 소리다. 가령 누군가가 돗자리나 텐트 대신 매트리스를 들고 야외로 놀러가는 광경을 당신은 얼마나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매트리스가 장소를 이루는 중요한 사물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부피와 무게 때문에라도, 그 자체가 장소가 되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간만의 장편영화인 <다섯 번째 흉추>에서 박세영은 태연하게 매트리스를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이전에 결별한 것으로 보이는 커플이 매트리스 위에서 서로를 껴안을 때, 죽어가는 여자가 매트리스 속 곰팡이에게 말을 걸 때, (아직 커플이 아닌) 커플이 굳이 전봇대와 매트리스 사이의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애정행각을 벌일 때, 이 매트리스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는 엄연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박세영이 기쁨을 느끼는 건 이 지점이다. 어떤 기쁨? 영화를 만드는 것의 기쁨.


(피터 브룩을 따라) 진행 중인 세계 속에 무대를 세워 거기서 허구를 조직하는 일로 연극을 (광범위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영화는 그 연장선에서 무대를 따로 세우지 않아도 허구가 조직되도록 할 수 있는 일일 테다. 카메라가 무언가를 찍고 녹음할 때, 혹은 프로젝터가 무언가를 투사할 때 이미 그 자체로 허구가 조직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유튜브 채널 ‘낄낄상회’에서 제작한 ‘몰카 예능’을 떠올려도 좋다. 여기서 허구는 연기 중인 배우들 뿐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일반인들에 의해서도 조직된다) 영화는 세계의 사건을 허구화 하는 데 있어 강한 인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장소를 찾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소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다섯 번째 흉추>로 돌아와 얘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매트리스가 있는 한 모든 공간이 영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영의 기쁨은 곧 세계의 사건들을 허구화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일 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불안도 느끼는데, 그렇게 손에 쥔 것들을 엮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화면과 소리가, 곧 허구화된 사건과 사건이 과연 서로 ‘붙을’ 수 있을까? 프레이밍에 의해 파편화된 그것들은 지나치게 강렬하기에 하나로 엮이기는 커녕 기형의 무언가가 될 지도 모르고, 서로 충돌(‘Bump!”)해서 서로를 산산조각낼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영화의 요소들이 정말 하나의 경험을 형성한다고 어떻게 쉬이 믿을 수 있을까?


그의 작품에서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어색하거나 파국의 징조가 되곤 하는 건(<Godspeed>), 또 종종 그런 상황에서 엇박의 컷이 이어지는 건(<금장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는 <다섯 번째 흉추>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진술들이다. 인물들의 감정이 폭발해도 감정선이 전혀 이어지지 않아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불안은 이렇게 인물들을 둘러싼 법칙의 불안으로 육화된다. 이 숏폼(Short-form) 위주의 SNS가 우리네 삶의 감각과 깊이 연동되는 중인 당대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 이미지들 사이의 연계 혹은 그런 연계를 가능케 하는 주체의 인지적 능력을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매체보다도 확연히 약화시키는 이런 체계는, 사실 박세영을 포함한 동시대 영화의 얼굴들이 처해있으며 또 (드물게도) 맞서려는 상황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정녕 흥미로운 것은 박세영이 영화의 기쁨과 불안을 일부러 항상 함께 다룬다는 데에 있다. 현란하며 툭툭 튀는 그의 컷의 리듬을 떠올려보라. 인물들로 하여금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고(<Godspeed>) 한 공간 안에서도 끊임없이 이동하도록(<Vertigo>) 만들었던 박세영이 매트리스라는 장소 자체의 방황을 상상할 때, 그리고 그 장소가 하나의 ‘생물’로서 수많은 두 얼굴의 대면을 파국으로 몰아갈 때, 거기엔 장소를 만드는 일의 기쁨과 다름아닌 그 장소가 두 얼굴의 대면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불안이 치열한 씨름을 하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 번째 흉추>의 숨겨진 주제란 두 얼굴이 평화롭게 마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에 관한 고찰일 것이다.


두 얼굴이 투 숏으로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고 해도, 숏-리버스 숏으로 연결된다고 해도 만남은 이뤄지지 않을 지 모른다. 만남의 형식/법칙이 그 자체로 이상적인 만남으로 이어지 않는다는 걸 박세영은 언제나 명심한다. (그의 작업에서 모종의 형식/법칙은 캐릭터들의 선택과 리듬으로부터 늘 분리되어있다. 신체 없이 울려퍼지는 소리들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만난다는 건 단지 서로 붙거나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의미에 평등하게 간섭하고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하나의 경험을 이를 테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주치게 하고, 또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 우리는 (영화 속에선 매트리스 속 곰팡이로 표상되는) 법칙을 만들고 행하는 조건 자체를 만남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다섯 번째 흉추>는 이런 난감한 질문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끝내 산산히 깨진다. 하지만 그 앞에서 혀를 끌끌 차고 그냥 자리를 뜰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영화의 마지막의 끝없는 속삭임이 들린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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