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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22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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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Sep 18. 2022

고다르와의 안녕을 슬퍼하지 말자


피터 브룩에 대해서도, 클라우스 슐체에 대해서도, 샘 길리엄에 대해서도, 닐 애덤스에 대해서도, 댄 그레이엄에 대해서도, 장 자크 상페에 대해서도, 아오야마 신지에 대해서도, 하비에르 마리아스에 대해서도, 윌리엄 클라인에 대해서도, 모니카 비티에 대해서도, 올리비아 뉴튼 존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상실감 속에서도 뭐라 말을 더하기 주저하고 있었다.(다만 악명 높은 성추행범인 솔 크립키에 대해선 어떤 상실감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장 뤽 고다르의 죽음 앞에선 굳이, 또 기어이 짧게라도 무언가를 쓰는 걸까.


슬픈 표정을 짓는 것 만큼 그의 마지막 선택에 어긋나는 짓도 없다 거듭 생각하면서도 거듭 타자를 치고 있는 건 또 어째서일까. 내가 고다르에게 진 빚이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영화 스타일의 역사에 있어 영향력 있는 영화 감독이라든가 하는 사실과는 큰 상관이 없다. (같은 말이지만, 현대 영화의 기법을 만든 혁신가라며 고다르를 애도하려는 이들은 스스로도 속일 만큼 무시무시한 거짓말쟁이들일 게다. 점프컷? '현실적인' 냉소주의? 즉흥 연출? 징그러운 말들일 뿐이다.) 나의 빚은 자기 앞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의 배움에서 생겼다.


(고다르보다 불과 하루 먼저 이곳을 떠난) 마리아스는 <사랑에 빠지기>에서 극중 인물인 디아스 바렐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종교와 거의 대부분 국가의 법체계, 심지어 그 나라의 헌법도 동일하게 말하죠. 그러나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어요. 우리가 만들지도 않았고 얻은 것도 아닌 것에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이지?라고 그는 말하곤 했어요. 그 누구도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혹은 예전에 이 세상에 있어본 적이 없다거나, 영원히 그 안에 있어본 적이 없다면서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왜 죽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혹은 나중에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또는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를 수 없다고 불평하나요? (p.442~443)


그리고 2018년 칸 영화제에서의 (영상통화로 진행된 악명 높은)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고다르는 마리아스와 공명하듯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나의 사실에서 흥미로운 것은 벌어진 일 뿐만 아니라 벌어지지 않는 일이고, 이 둘은 함께 가며, 여러분은 그것들을 함께 연결시켜야 합니다. 벌어진 일에 대해 마냥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벌어지지 않는 일보다 벌어진 일에 대해 더 많이 논하죠.



벌어지지 않은 일을 논하고, 그것을 벌어진 일과 연결시키는 것. 말하자면 포이에시스의 재구성? 물론 이 말 자체는 고다르가 평생 즐겨 쓴 아포리즘의 한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건 눈 앞의 가능성에 명랑하게 구멍을 뚫는 것이고, 무거운 대상을 뻔뻔하게 가벼이 여기는 것이고, 거듭 "끝나지 않았다"고 불경하게 외치는 것이고, '나'의 몸과 정신에 묶인 끈들을 끈질기게 더듬어보는 것이며, "현대적 삶의 시네아스트"(유세프 이샤그푸르)인 고다르에게 있어선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하나의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느냐고 우둔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래, '고다르 혁명'(하스미 시게히코)이랄 게 정말 일어난 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질문의 태도에 있어서일 테다.


그나마 고다르에 관심을 갖는 소수는 질 들뢰즈를 따라 종종 그를 "'그리고(et)'의 작가"라 부르곤 하지만, 그런 이해란 정확한 부연 없이는 오해로 오염될 여지가 있는 듯 하다. 분명 고다르는 상이한 문제들을 과감히 교착시키거나 (재)조합해보며 "하나의 사실"을 해체하는 과격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주유소의 간판을 보며 상품화의 논리를 논하고(<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 하나의 몸에서 세속성과 영성을 동시에 찾는(<마리아에게 경배를>), "사물들 사이의 다양한 종류의 간격에 대한 탐구"(스테판 크리스텐슨)로서의 상상력 말이다. 허나 얀 니더반 피터세가 일러주었듯 그런 상상력 자체는 오늘날엔 고도로 추상화/복수화된 자본과 결탁한 디지털 미디어의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것은 생산/저장/유통에 있어 모든 존재를 연결하고, 환원하고, 결국 집어삼켜 침묵시키려 든다. 허황된 자율성의 약속. 


그러므로 우리는 고다르의 상상력이 항상 '이것'과 '저것' 사이에 "그리고"라고 거듭 말할 수 있게끔 하는 어떤 기이한 현실, '오직 하나 뿐인' 현실을 겨냥했다는 걸 유념해야한다. 사무엘 퓰러가 읊는 <미치광이 피에로>의 저 유명한 대사를 맘대로 베껴 말하자면, 영화이자 전쟁터이고 경제이자 감정이며 법이자 문화인 현실 말이다. 이런 '근현대적' 현실의 복합적인 양상을 "그리고"라 중얼거리며 필사적으로 더듬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에 맞서려는 것이 바로 장 뤽 고다르의 과업/예술(Opus)이요, 내가 고다르에게 진 빚으로서의 태도다. 유운성의 말처럼 "가치를 전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가치의 동요를 폭로하는 사람" 고다르. 문제들을 연결하고 조합하는 현실의 모순적 상상력을 밀어붙여, 오히려 현실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파되게끔 하는 그의 수사법은 바로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고다르의 죽음을 함부로 슬퍼해선 안 될 것이다. 안락사라는 마지막 선택을 통해, 그는 (<이미지의 책>의 마지막 장면처럼) 가치의 동요를 폭로하는 광대로서 스스로를 여전히 무대 위에 올려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비극적인 몸짓이지만 그만큼 희극적인 몸짓이기도 하다. 그를 애도하고자 한다면 그의 "단순한 왈츠"들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며,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를 곱씹고 이어가려 애쓰면 될 것이다. 고다르와 그의 시대 이후에도 역사는 계속 된다. 그러니 당장은, 적어도 당장은 고다르와의 안녕을 애도하되 슬퍼하지는 말자. 언어는 계속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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