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서 새로 출범한 인문학 총서인 '탐구' 시리즈의 일환으로 윤아랑의 첫 단행본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이 출간되었다.
2020년 이래 발표한 글과 강연문들을 상당수 수정해 엮은 ―가령 일전에 「필연적인 관계의 지도」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글은 많은 부분을 추가하고 수정해「만화라는 이상한 관계」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책에 실었다―짧고 작은 비평집으로, "동시대 문화 탐구"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에서 출발하는) 일종의 문화비평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이 겨냥하는 대상이 "동시대 문화"이자 "문화의 동시대"라는 사실은 페이지를 조금만 넘겨봐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종래의 '문화비평'과는 다른 것, 사회와 예술의 관계 혹은 구조와 힘의 관계를 달리 설정하는 문화비평을 위한 흙을 파는 게 책을 만드는 데 있어 나의 제1 목표였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물론 여러분의 몫이다. 사실 책에 대한 불안은 아직까지도 내 안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이 각각의 글들이 정말 하나의 책으로 묶여 현재의 공론장에서 유효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 말이다. 이 불안은 내 작업에 대한 불만이기도 한데,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풀 터이니 기다려주시라.
표지의 이미지는 란탄의 만화 <성숙의 지표>의 한 페이지에서 따온 것이다. 이미지의 사용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란탄 님께 감사드린다. 책머리에 근사한 추천사를 써주신 미술평론가 리타 님께도 더없이 감사드린다. 이 이외에 감사 인사를 받을 사람들은 책 말미에 실린 「감사의 말」을 확인하시라.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친구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책이 어떤 의식 속에서 묶였는가를 알고 싶다면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하시라.
아래는 책의 서문이다. 일전에 모 잡지의 청탁을 받고 썼다가 '잡지의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원고를 약간 고쳤다.
하나의 구조물을 상상해 보자, 삶이라는 구조물을. 그리고 그 구조물의 지지대들을 떠올려 보자. 이는 삶을 이루는 요소일 것이다. 인종, 지식, 계급, 재산, 젠더 정체성, 정치적 지향, 성적 지향, 인정 욕구, 문화적 취향……. 그런데 어떤 지지대가 만약 ‘보편적’ 기준과는 달리 질이 나쁘거나 지지대들이 서로 엉성하게 엮여 있어서 위태로워 보인다면, 그 구조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삶다운 삶’이 못 되니 쇄신되거나 사라져야만 할까? 아니면 이것 역시 엄연한 삶이니 그 자체로 유지시키고 존속시켜야 할까?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방법도 있을 테다. 쇄신의 시도와 유지의 시도 모두를 신중히 오가며 판단을 세우는 것 말이다.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이다. 그래서 대개 긍정한다는 건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된다. 부정하는 것이 무언가를 지우고 어디선가 빠져나오는 일이라면 긍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직시하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지금 나는 철학의 위대한 ‘부정성’의 계보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혹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이나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처럼, 상투적인 ‘긍정성’의 폭력을 폭로하는 연구들에 반대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계보에 기댄 채 말을 내뱉는 중이다. 스스로의 변호를 위해 『정신현상학』의 「서론」에서 드러나는 게오르그 헤겔의 긍정을 인용하자면,
이러한 위력으로서의 정신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대해 마무리 짓고 나서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 갈 때처럼,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긍정한다는 건 긍정적인 것과 다르다. 더러운 것을 외면하고 예쁜 것들에만 주의를 돌리거나,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자체로 수긍하고 낙관하는 일인 ‘긍정적인 것’에 헤겔은 고개를 젓는다. (슬라보예 지젝이 여기저기에서 끈질기게 말했듯) 그의 긍정은 차이, 어리석음, 우연성 같은 ‘부정적인 것’의 침투에 열려 있는 긍정이다. 나아가 부정성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긍정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투에 한없이 열려 있기만 한 건 아니어서, 이 긍정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그 모든 침투를 내재적으로 가로질러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통일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를 상정한다. 주체의 성립 조건으로서 타자라는 구도의 필요 조건으로서 주체랄까?
이와 비슷하게 ‘중립’(롤랑 바르트), '판단 중지'(에드먼드 후설), 혹은 '경계 사이에서의 진동' 같은 수사들은 수사 자체로 윤리적인 게 아니다. 보편성의 규칙을 거부하는 걸 넘어 보편성에 대해 완전히 다른 판단, 완전히 다른 분류를 요구할 때에 이 수사들은 진정 윤리적으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완전히'라는 말은 '새로움'과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다.) 헤겔의 긍정은 이 점에서 선구적인 윤리성을 갖는다. 혹은 헤겔의 변증법은 이렇게 다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평생 헤겔을 부정한 질 들뢰즈이지만, 그가 『니체와 철학』에서 긍정을 말할 때에는 이상야릇하게도 지금까지 논한 헤겔의 잔영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문제는 부정인데, 하지만 긍정하는 권력으로서의 부정이다. 만일 우선 부정이 반동적 힘들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소멸하고자 하는 인간 앞에서 긍정적인 권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또 나아가 만일 부정이 긍정하는 관점에서 모든 반동적 가치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한데 모으고 총체화하지 않는다면, 긍정은 그 자체로 긍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하기는 ‘나’를 복수화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판단을 세우기 위해 ‘나’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동시에 가까워져야 한다. 가령 삶이라는 구조물을 제대로 대하기 위해서는 멀리서 그것이 속한 체계를 바라보며, 한편 가까이에서 그것의 구성 요소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견 서로 모순된 것 같은 이질적인 면들조차 ‘구조물에 대한 것’으로 함께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한다는 건 대상을, 또 세계를 복수화해 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긍정의 진정한 대상은 사실 대상 자체가 아니라 상이한 힘들이 대상에서 맺는 관계일 테다.
고로 소수의 진정한 긍정은 일견 역설로 보이는 것을 요구하는 쪽으로 향한다. 문화(적 생산물)를 대하는 데 있어 이해와 오해 모두에 열려 있을 것. 어떤 언어나 몸짓이 한 구조의 부품이자 다른 구조가 새로 절합되도록 만드는 '기계'임을 명심할 것. 우리가 “생산의 현장에서 주체가 되는 것과 동일하게 소비의 현장에서 하나의 주체로 거듭나고”(장동기, 「「자동으로 수확되는 주체」에 덧붙이는 전략적 주석」) 있음을 인정할 것. “젠더를 억압과 배제의 조건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자 그 자체의 즐거움을 가진 것”(진송, 「젠더의 즐거움과 인간의 존엄」)으로 사유할 것. 성매매 산업의 폭력성을 지적하면서 성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울 것(몰리 스미스·주노 맥, 이명훈 옮김, 『반란의 매춘부』). 혹은 존 포드, 테즈카 오사무,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내게 있어 그런 굳건한 긍정의 예술가들이다. 결국에, 긍정한다는 건 기꺼이 책임지는 일이다.
여기에 모인 (2020년 1월부터 2022년 4월 사이에 발표된) 글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긍정을 수행하려 애쓴 흔적이다. 서로 전혀 다른 시간과 자리와 의도 속에서 쓰였지만, 동시대 문화에서 수많은 힘들이 맺는 관계를 새로이 긍정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 글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 긍정은 물론 동시대 문화라는 범주에 대한 다른 판단, 다른 분류를 모색하는 것이기에, 이 책은 동시대 문화에 관한 비평집이면서 동시에 ‘문화의 동시대’에 관한 비평집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책이 되길 바랐고, 바라고 있다.
1부는 ‘몇 발짝 물러나서’ 비평장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시스템에 대해 메타비평을 시도한다. 2부는 영화, 문학, 미술 작품들 안으로 ‘몇 발짝 들어가서’ 클로즈 리딩을 통해 거기에 엮인 상이한 힘들을 고찰하며, 3부는 예능 프로그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리고 웹툰을 텍스트 삼아 ‘주위를 떠돌다가’ 이런 텍스트들을 포괄하는 문화의 양상을 직시하는 환경 분석(아즈마 히로키)을 시도한다. 대중음악과 한국의 문학장에 대한 글 하나씩을 책에 더 실으려 노력했으나 나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 못내 아쉽다. 각 장의 각각의 글들은 서로 미약하게라도 연계가 있긴 하지만 꼭 순서대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해, 극렬한 자기혐오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에 실린 어떤 글도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제대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기에,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글을 계속 썼다. 그래서 이 책은 긍정을 수행하려 애쓴 흔적의 모음인 만큼, 내가 스스로에게 제시한 문제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종종 울적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나를 긍정한다. 부정적인 정동이 나의 말과 삶을 지탱하고 또 유지시키고 있다는 걸, 자기혐오 없이 나는 없다는 걸 기꺼이 긍정한다.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끝없이 긍정을 말하고 싶다.
본문에서도 지나가듯이 거론하고 있지만 책의 제목은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한 인터뷰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조영일의 말 한마디를 마구잡이로 변형해 무기로 쓰고 있듯이, 여기에 있는 긍정의 흔적들이 당신에게 무기로 쓰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결국에는 그것이야말로 비평가인 내게 주어진 책무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