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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n 02. 2022

「한국문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


계간《자음과모음》2022년 여름호(53호) 크리티카 부문에 (작가이자 워크룸 프레스의 편집자이신) 김뉘연 씨와 함께「한국문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의 글로 참여했다. 작년 가을호부터 《자음과 모음》은 "세대 간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자 서한교환 형식의 비평 기획인 '매일메일'을 진행하고 있으며, 나는 그 일환으로 한국의 '공식적' 문학장에서 세계문학의 애매한 위상에 대해, (본문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문학이라는 비(非)-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첫 의도가 무색하게도 김뉘연 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나의 문제의식은 변화하고 확장해, 결론적으로 우리의 대화는 한국문학이라는 범주의 성립이 왜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의 기록이 되었다. (다시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문학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데 있어 필요한 정책"에 대한 가늠. (이런 확신은 정말 정말 드물게 하는데,) 이 대화가 여러분께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100매라는 분량이 너무도 모자라 아쉬울 뿐. 이번 기획에 충실히 참여해주셨을 뿐 아니라 '정확한 오독'으로 글의 방향을 바꾸고 밀고 나가주신 김뉘연 씨께, 그리고 문예지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주제를 받아들여주신 《자음과모음》 편집부 측에 감사드린다.


* 해당 글은 12월 19일부터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를 통해 온라인 상에 공개되었다. 아래는 글의 링크다.






"우리가 속한 땅을 돌아보면, ‘볼라뇨 신화’는 이런저런 검토 없이 그저 ‘볼라뇨 신화’라는 동어반복에 갇힌 채 유통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지난 2021년 당시 국내에 처음 출간된 것 중 제게 가장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던 3권의 소설―옌롄커의 『일광유년』(자음과모음),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의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소설집』(섬과달),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워크룸프레스)―은 어떤 지면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요. 다른 출판사에서 낸 책을 ‘문예지’가 왜 다뤄야 하냐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한편으론 그런 ‘당연한’ 인식이 미심쩍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론을 쓰고 있다고 다른 비평가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아니 그걸 어디서 받아?”였지요. 세계문학은 문제 아닌 문제라는 애매한 위상을 지닌 채 한국의 문학장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문학의 번역은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활동의 바깥에서 이뤄지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 문학적 활동을 안에서 자극하고 뒤흔드는 움직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역된 세계문학을 다루는 것은 한국문학이라는 영토의 근본적인 가변성과 거기에 엮인 관계들을 이해 및 개시하려는 하나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유의 연장선에서, 한국문학이란 소설과 시와 희곡를 넘어 한국어로 진행되는 온갖 언어활동을 포괄하는 ‘테크놀로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세계문학은 (좁은 의미에서의) 한국문학과 늘 같은 선 위에 놓인 대상이지요. 적어도 독자로서의 우리에게는 그러(해야)합니다. 하나 그런 대상으로 세계문학을 다루기에 우리네 문학비평은 소심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처음엔 예상치 못했는데, 저희의 대화는 한국문학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데 있어 필요한 정책을 가늠해보는 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일부 한국문학 작가들은 이미 세계문학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한국문학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거나 “문학의 안팎을 다루는, 경계를 확장한 문학과 인접 분야와의 관계와 번역과 글과 매체의 관계 등을 다루는 비평지가 마련된다면 어떨까”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좀 더 확장해 단절과 반복의 연속으로서의 한국문학사를 직시할 방안에 대한 탐색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테지요. 생뚱맞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답신을 읽으면서 저는 문득 ‘현대음악’의 궤적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손과 입에 얽힌 현실적 조건들은 이 대화가 실질적인 정책으로 육화하는 것을 끝없이 지연시킬 것입니다. (어떤 현실적 조건이 어떻게 이런 정책들을 불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해선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저희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도 말을 이어가겠지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편지들을 읽을 독자들의 정신 한 켠에 ‘한국문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는다면 일차적인 목표는 이뤄낸 거겠지요. 그래서 저희의 편지가 언제일지 모를 훗날에 도래할 ‘오염된’ 문학장의 자양분이 된다면 더없이 행복할 테고요.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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