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2022 0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May 19. 2022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지난 달 16일 영상비평지 《마테리알에서 개최한 발표대회인 제1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에 발제자로 참여해 「정당화하는 관점 - 임흥순에 대한 불만」이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그 녹취록이 정리 및 공개되어 여기 소개한다. 제목에서 금방 알 수 있듯 이 글은 '영화 감독'이자 '영상 작가'인 임흥순에 대한 비판적 작가론을 표방하고 있으며, 임흥순(을 비롯한 동시대의 특정 예술작품군)에 대한 나의 오래된 불만을 여기서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했다. 임흥순이 어떤 작가인지, 다른 평자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임흥순의 작업에 대해 갖는 불만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동시대 예술가들 중 임흥순만이 겪는 문제인지를(사실 나는 본문이 공동체 얘기라기 보단 주체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자세하게, 임흥순의 작업을 본 적이 없는 이에게도 호소할 수 있을 만큼 쓰고자 노력했으며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아마도 내가 2020년 이래 발표한 긴 글 중 제일 읽기 쉬운 편이 아닐까 싶다. 발표 도중 사실 관계를 틀리게 설명한 여러 부분들에는 [발표자 주]를 달았으며, 질의응답 시간에 허둥지둥대거나 정돈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 부분들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현장의 느낌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녹취록을 볼 수 있는 노션의 링크이며, 다른 분들의 발표도 퍽 인상적이라 두루두루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또한 이 때의 발표문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나의 첫 단행본인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 수록될 예정이다.






"임흥순 작가에 대한 발제를 해달라는 마테리알 측의 제안을 받은 건 지난 2월 달 말입니다만, 어쩌면 오늘 제 발제는 2019년부터 조금씩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마테리알 측에서 제게 임흥순 작가에 대한 얘기를 청탁한 이유가, 제가 2019년 말에 쓴 트윗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해당 트윗을 여기 이렇게 친절하게 써 주셨는데요, (웃음) 제가 또 육성으로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내 생각엔 임흥순을 잘 박살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를 조져버려야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이 트윗이 표출하고 있는 과장된 적의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뜻에 있어서는 생각이 크게 변한 바가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방점이 찍혀서 설명이 되어야하는 건 “잘 박살내는” 것. 그리고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일 것 같습니다. 또 이 트윗은 임흥순의 작업에 대한 적의와 함께 임흥순의 작업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대한 적의를 포괄하고 있기도 합니다."


"역사 없는 기억은 맹목적이고 기억 없는 역사는 사실 창백할 뿐이죠. 역사와 기억을 대립시키는 대신 임흥순은 역사와 기억을 얽으면서 ―이 이분법이 성립 가능하다면요― 시간, 사건과 그것들의 조건을 함께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임흥순이 동원하는 것은 물론 그의 허구적인 터치들이죠. 흔히들 퍼포먼스 씬이나 재연 장면이라고 일컫는 그의 장면들이요. 임흥순의 작업에서 독특한 건, 분명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탐사보도 TV 프로그램처럼 재연이나 꿈 장면 같은 허구적 터치들을 종종 가미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목적에 있어선 관습적인 ‘재현’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위로공단>을 보고 난 뒤에 임흥순에게서 여성노동의 고난이 직장 내 성차별이라는 심급에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이 기피되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즉, 남자 없는 ‘여성성’ 비판이 가능하냐고 묻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엄연히 다른 방향성을 가진 작업에 대해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웃음) 일단 차치를 하고, 이는 이른 바 ‘여성’ 내부에서도 차이 및 투쟁이 발생하며, 그 역시 꽤 중요한 토픽이란 것을 간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임흥순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거든요? 저는 지금 <위로공단>의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답십리의 동산을 함께 오르는 두 여자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상이한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란히 비교되거나 묶일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합니다. 적어도 모더니즘의 시대에 도래했던 영화는 그런 무차별성의 과업을 특히 잘 해내던 양식이죠. 한데 앞서 꾸준히 얘기했듯 ‘상이한 것들을 묶기’라는 말에서 임흥순은 “묶기”에 거의 집중하지 “상이한 것들”은 거의 파고들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그를 둘러싼 여러 평자들도 ‘임흥순은 타자에 한없이 열린 사람’이라는 명제를 갖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정반대거든요?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임흥순의 관점은 ‘잠재적인 공동체’를 미리 상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사건들과 사람들의 차이를 적당히 정돈해 제시할 수 있는 메타적 조망의 자리에 있습니다. 수직 시점에서 역사를 내려다보고 판단하는 그릇된 관습이 여전히 그에게서 존속되고 있는 거죠."







이전 03화 탐구하는 생활 : 책 10권 + 10문 10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