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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26. 2021

여기 없는 책의 변호

연말결산과 인사를 대신하여

<Je vous salue Marie> (1985)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가장 많이 걱정했던 것은, 지난번 독회 때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이 글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 제가 여러분께 제공한 글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각기 다른 상황을 위해 쓰이고 공개된 것입니다. (물론 많은 글들은 손을 아주 많이 보긴 했지만요) 그래서 어떻게 한 권을 쓸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선 큰 고민을 갖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 권을 만들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선 걱정의 수준으로 고민이 쌓였지요.


저는 이 기획이 저로부터 시작되고 끝날 뿐인 평론모음집이 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하나의 궁극적인 문제의식이 어떻게 각개전투에 가깝게 분기하느냐를 보여주는 책이 되길 바라고 있고, 사실 이 욕심이 이 기획의 준비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일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저로부터 나왔지만 다른 맥락에 배치되고 작동한 글들 사이에 어떤 연동을 도출하여 새로 배치할 것인가-이게 제가 가진 걱정인 거죠. 이는 책을 어떻게 홍보하고 팔고의 문제이기도 하며, 책이 어떻게 현재의 공론장에서 유효타가 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걱정은, 제가 좁은 의미의 영화평론가라고 하기엔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로 다루는 대상이 영화를 비롯한 시각문화이고, 개별 영화나 작가에 대한 클로즈 리딩을 수행하는 글들이 있긴 하지만, 「네임드 유저의 수기」와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는 비평장에 대한 비판이었고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은 영화이론의 개념들을 약간 이용한 소설 비평이며, 현재 집필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 매달리고 있는 글은 1960년대 말의 록 밴드인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관한 노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문화평론가일까요? 제가 큰 범주로서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남한에서 '이른바' 문화평론이 실은 제도화된 문화연구의 일종, 즉 예술작품을 가능케 하는 맥락이자 심급으로 사회 혹은 경제를 특권화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면, 제 작업은 조금 다른 흐름에 속해있다 생각됩니다. 저는 작품들을 다룰 하나의 통섭적인 이론을 구축하려는 쪽이 아니라, 범주들 각자의 규칙을 잘 파악하는 동시에 그 사이의 반복과 마찰과 혼란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 판단의 네트워크를 매번 재배열하려는 쪽에 속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앞서 말한 “궁극적인 문제의식”, 즉 모종의 이념은 견지해야겠지만요.


제 생각에, 당장의 저에게 그것은 '주체성'과 '관계'입니다. 여기서 최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쟁론』이 떠오릅니다. 그 일부를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이름은 의미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의미 역시 이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데, 어떻게 의미가 이름에 부착되는 것일까? 경험이라는 관념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이름과 의미의 연쇄를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69절) “경험이라는 관념은, 도래하는 사물들(사건)의 속성을 취합함으로써 실재를 구성하는 나라는 관념을 전제한다. 이러한 나와 관련하여 사건들은 현상들이 된다.(71절)"


리오타르가 관계라는 말을 직접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여기서 관계의 미스테리함을 읽게 됩니다. 주체로서의 '나'는 이런저런 관계들의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합일 뿐이지만, 이런저런 관계들은 그런 가상으로서의 '나'의 관장 없이는 새로 교차되고 창발할 수 없죠. 서로를 전제해야만 자신이 성립될 수 있는 이 미스테리한 루프 속에서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건드리며 서로를 가변적으로 (재)구축합니다. 돌이켜보면 테레사 드 로레티스를 비롯한 퀴어 이론의 개척자들이 포착한 세계상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이 광경을 문화라는 큰 범주 안에 접속해 시퀀스화시키려는 이상을 갖고 있지요.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저는 (정동 이론 같은 조류가 속한) 주체성의 현상학만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 역시 우리에게 어느 정도 필요하고 나름 유효한 방법론 중 하나이긴 할 것입니다. 하나 그보다는 주체성이 어떤 구조를 붕괴시키면서 다른 구조를 새로 절합하(도록 유도하)는 '기계'라는 사실이 저의 주의를 끕니다. (일전에 편집자님께 총서의 서문을 저자 자신이 아닌 남이 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했던 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져온 글들은 웬만해선 그런 생각 속에서 쓰여졌고 은연중에 그것을 말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몇 가지를 간단히 얘기해보겠습니다.


일단 예능에 대한 두 편의 글과 「필연적인 관계의 지도」는 명시적으로 주체성과 관계를 논하고 있으니 제외하겠습니다. 국가폭력을 다룬 「모가디슈와 분단의 짐」은 '차창 밖을 향하는 시선'이라는 흔한 표면이 류승완이라는 주체에게 어떻게 소화되어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다룬 글이기도 합니다.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은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에서 나타난 근대적 시각 주체를 논하면서 그 와중에 거의 비워진 주체가 어디까지 책임지게 되는가를 파고들고 있죠. 「너무 접촉하거나 너무 떨어지거나, 혹은...」의 후반부는 주체로서의 대중이 어떤 '가상적 근원'의 “확장 연결이자 평행 연결”이라 할 최근의 웹소설을 왜, 그리고 어떻게 승인하는지에 대한 스케치라 할 수 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저는 주체성 옆에 항상 '자유'를 괄호 쳐두는 수많은 논의들에 회의적입니다. '예속'을 괄호 쳐두는 논의 역시 마찬가지고요. 주체성이 '기계'라고 말한 건 그것의 탈인격적인 성질, 애매한 위상을 직시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물론 스피노자에서 프로이트, 그리고 그 이후의 거장들이 천착한 '주체의 탈각'을 감히 개괄할 생각은 아닙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이 더 잘 아시리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사실 그게 하려는 말도 아니고요. 제 관심은 너무 쉽게 구조의 모순이나 저항으로 승격되거나, 또 너무 쉽게 구조의 부품이자 멍청한 노예의 자리에 놓이는 대신, (들뢰즈/가타리와 단 자하비를 따라 말하자면) 양자의 극단을 오가며 그 구분을 은근히 뭉개는 다른 성질과 위상을 향합니다. 이는 진부한 절충주의와는 다른 태도일 것입니다.


핼 포스터는 「실재의 귀환」에서 1990년대의 혐오미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이의) 트라우마는 믿을 수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시만 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 담론에서, 주체는 소개되는 즉시 고양된다.”


즉 그는 상징계와의 단절 및 그것의 와해를 추구하는 '폭력'을 이상화하는 혐오미술에서 “저자의 이상한 재탄생, 부재자의 권위”라는 역설적인 난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씁쓸하게도 이는 오늘날 진정 찾아온 듯한 포스트모던적 조류 속에서 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지금 우연성/가변성 자체를 페티시화하는 '동시대 미술'의 몇몇 사례들과 케이팝이라는 '반(anti)-장르'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난점을 쇄신할 예술의 길은 무엇일까요? 다시 혐오미술에 대한 포스터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대다수의 혐오미술이 가지 않은 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죠.

“질서와 절대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험에 처해있음을 드러내어, 이 지점을 와해만이 아니라 또한 돌파구로서 이 위기가 공개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등재하는 것”


이는 그가 (이 글에서 직접 거론하고 있듯) 자크 라캉의 세미나들을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얻은 결론일 것입니다. 현실의 불완전성을 자각시키며 상징계의 재정립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예술. 어쩌면 보수적으로 비칠 이 길에 저는 믿음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터와 완전히 같은 논리 위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주체상은 감각/경험에만 머물 뿐 객체에 닿지 못한다'는 식의 기각(-비판)의 방법론을 가져갈 생각이 없고, 또 저 자신의 약자성을 파먹는 데서 원동력을 얻을 생각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언제나 “탈인격적인 성질, 애매한 위상을 직시”하며 그에 따라 움직이고자 합니다. 가령 당장 나이브하거나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관계의 양식이 왜 요구되었고 그동안 유지되었는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쇄신할 방안엔 무엇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 말이죠. 제게 이는 긍정이란 말로 정리됩니다. 돌이켜보면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 그리고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은 바로 그런 긍정에 충실하려는 (미완의) 시도들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이 기획의 타겟이 다름아닌 제 주변의 또래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소 적대적인 타겟팅이죠. 좀 순진하게 말하자면 '우리 그렇게 투쟁하지는 말자, 좀 더 침착하고 열린 태도를 가져보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여기서도 저는 고독보다는 긍정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내가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때, 그것은 슬프거나 박탈당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가 나누어놓은 두 세계에 다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오늘 들고 온 부분은 아직 전체 분량의 70% 가량입니다. 현재 혼자서 준비 중인 글로는 타자성에 대한 강박과 영화 장치의 연관을 다루는 글, 긍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책임과 성장 같은 주제를 성찰하려는 글,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관한 노트가 있습니다. 모 문예지를 위해 쓰고 있는 글도 있는데, 이건 또 한국문학장 속에서의 세계문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이 책에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또 내년에 어떤 청탁이 더 들어오고, 집필 중인 글들의 분량이 더 커지거나 작아질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여튼 이 기획이 한 권의 책이 될 때 어떤 모양새를 갖추게 될지, 저 역시 궁금해집니다.


아직 여기 없는 책을 위한 소개 혹은 변호가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습니다. 아직 변변찮은 상태의 원고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수와 같은 코멘트를 고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위는 얼마 전 진행된 독회를 위해 쓴 발제문이다. 지금 나는 2020년 이래 발표한 글과 강연문, 그리고 앞으로 발표할 몇몇 글을 엮은 비평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출판사는 여러분도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것 같다― 본 발제문은 그 (여기 없는) 비평집의 목표와 그 준비 속에서의 고민을 드러내고자 한 글이다. 책에 실릴 글들은 대부분 발표 당시 판본에서 손을 많이 댔고 앞으로도 더 많이 손을 댈 예정인데, 그럼에도 출판이라는 명목 하에 브런치에 공개했던 글 중 책에 실릴 것들을 비공개 처리했다.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물론 나 역시 안다, 너무 이른 시기에 부족한 상태의 내가 책을 내게됐다는 걸. (가령 독회에서 많이 받은 피드백은 '지나치게 고맥락'이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긴장되고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며, 책이 나온 후 받을 (무관심을 포함한) 반응들이 미리 떠올라 밤잠을 이루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도 아니(리라고 믿)고, 책을 내겠다고 이미 말해버렸으니 그저 '나'를 타고 흐르는 부정적 정동들을 긍정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년에 괜찮은 책으로 여러분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금까지 윤아랑의 글들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더할나위 없이 감사하다. 당장 여러분이 볼 수 없는 새 판본의 글들을 상상하며 내년을 기대해주시길, 또 책이 나오면 많이들 사서 읽어주시길 바란다. 공립도서관에도 신청하고, 학교도서관에도 신청하고, 친구들에게 선물로 건네주시라. 그래도 후원은 농협 312 0112 5978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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