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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14. 2021

<아네트(Annette)>, 2021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카페크리틱'의 <아네트>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아네트>에서 레오스 카락스가 전개하는 것은 충실하고 충만한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뮤지컬 영화의 조건들을 성실히 뒤집고 고찰해보는 안티 시네마틱 뮤지컬입니다.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 자체의 전통과 방식에 기대는 대신 그에 앞선 무대극으로서의 뮤지컬의 전통과 방식을 제 안에 끌어들이는데요, 그 중심이 되는 게 바로 스테이지입니다. 그런데 이 스테이지란, 앤과 헨리와 아네트의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만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들의 삶이 우리 관객들 앞에 펼쳐지는 공간까지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오프닝 트랙인 So May We Start?의 가사를 곱씹어보죠. “But where's the stage you wonder? Is it outside, or is it within?” 안티 시네마틱 뮤지컬로서의 <아네트>는 그럼으로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요, 하나는 영화와 엮일 수 있는 다른 문화적 생산물의 코드들(가령 무성영화의 한 씬, TV 연예 뉴스, 유튜브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엔딩 크레딧까지 끊임없이 공간과 프레임의 안정성을 부수고 또 부수면서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의 환상)을 일그러트리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다룬 리뷰들에서 덜 언급되는 장면 중 꼽자면, 앤의 아리아 씬과 (사이먼 헬버그가 연기한) 지휘자의 “Excuse me” 씬을 함께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후자의 경우 카메라는 지휘자를 바라보며 원 씬 원 숏으로 회전하는데, 이 회전은 “Excuse me”라고 말을 건낼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내화면과 디제시스 내부를 끈질기게 지우며 그 바깥에(서 영화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우리를 강력하게 지시하는 제스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단지 시네마에 대한 모종의 소격 효과, 즉 구성 요소에 대한 폭로를 노린 작품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랬다면 <아네트>는 단지 포스트모던적 냉소에 찌든 흔한 '힙한' 영화에 불과할 테죠. 오히려 <아네트>는 영화가 그 속에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열심히 증명하려는 작품입니다. 달리 말해 (다른 예술을 위한 그릇이 되길 자처하는) 매체학적 맥락과 (영화적 공간의 성립에 있어 심도와 평면성, 영화 안과 밖이 서로를 순환적으로 보충하는) 현상학적 맥락에서 함께 펼쳐지는 역설적인 잡종성이야말로 영화의 본성이라고 카락스가 믿고 있는 거죠. 이런 움직임들을 통해 카락스는 자신의 직전 작품인 <홀리 모터스>에 이어 불순한 '것'으로서의 영화를 성실히 고찰하면서, 그 속에서 당대의 이미지 생태계에 대한 음울하고 냉소적인 비전을 밀고 나갑니다. 아니, 관객들이 더 이상 믿음을 갖고 스크린을 응시하지 않는다 여기고서 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인식론적 게임을 벌이던 <홀리 모터스>보다, 관객들을 둘러싼 이미지가 관객들을 유해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며 그것의 폭력성에 집중하는 <아네트> 쪽이 훨씬 음울하고 냉소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담이지만, <아네트>는 아마 여러 사람들에게 포스트 미투 시대에 대한 '불완전한' 반응으로 보일 터이고, 그런 독해가 퍽 타당성을 갖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 제 생각에 헨리의 마초적 폭력성은 이미지 생태계의 상태를 논하기 위한 모종의 알레고리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네트의 '존재'가 있죠. 아네트의 '존재'는 앞서 말한 잡종성의 집합체라 할 수 있어, <아네트>라는 작품 내적 세계의 허구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 허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변증법적인 긴장을 생성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관객들은 아네트가 인형이라는 걸 계속 인지한 채 영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런 아네트가 마지막에 이르러 언어화된 말을 하고 인간의 몸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유의해야 하는 건, 아네트가 그냥 인간으로 변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아네트와 인형으로서의 아네트, 이 둘로 찢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보니 그 바로 앞 씬인 재판장에서 앤 역시 둘로 찢어졌었죠. 헨리를 사랑하는 앤과 헨리를 증오하는 앤으로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찢어진다는 건 한 쪽이 기각되어 버려진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네트가 둘로 찢어질 때 일어나는 일은 인형으로서의 아네트, 즉 잡종성의 집합체로서 영화에 긴장을 생성하던 '존재'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다른 캐릭터들과 똑같은 대상인 인간으로서의 아네트만 남게 되는 거죠. 인간으로서의 아네트는 헨리에게 “다시 노래부르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고선 떠납니다. 이 마지막 노래는, 오늘날 이미지 생태계를 둘러싼 폭력성이 영화의 본성을 침묵시키고 있다는 카락스의 일갈을 대신 한 것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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