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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25. 2021

모가디슈와 분단의 짐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그라지라》에 영화 <모가디슈>에 대한 평을 실었다. 이 글은 '영화 <모가디슈>로 보는 국가폭력'이란 기획의 일환으로 쓰였으며, 여기서 나는 캐릭터들 사이의 (불화 이전에) 유대 없음에 주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간접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으로서의 국가폭력이 <모가디슈> 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고찰해보았다. 급하게 청탁이 와 급하게 쓴 글이라 썩 맘에 들진 않지만 -탈고는 물론 교정도 제대로 못했다!- <모가디슈>에 대한 세간의 평에 틈새를 내는 것으로 제 목적을 다 했다 생각하련다. 돌이켜보면 올해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한국영화가 별 인상을 거의 남기지 못한 해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에 대해선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도 간략히 짚고 넘어간 바 있다- , 시선을 조금 돌려보면 박세영의 <Vertigo>,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 임고은의 '아키펠라고 맵: 모래-정원 삼부작'처럼 기분 좋은 긴장을 느끼게 해준 '작업'들이 있어 좋았다. 맨아래는 《그라지라》의 PDF 파일을 다운받아 읽을 수 있는 창의 링크다.





"더군다나 여기엔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부터 불과 몇 개월 뒤 남북한 UN 동시가입이 이뤄졌음을 예견하는 그 어떤 지표도 없어, 언젠가는 유대가 자연스레 생기리란 기대마저 가차없이 버려진다. 하지만 그것뿐인가? 가령 급작스런 데모로 인해 한신성(김윤석 분)과 강대진이 호텔에 고립되었을 때 한국 대사관에 남겨진 이들 사이의 불화(권위, 종교, 정치관)는 어떤가. 모든 캐릭터들은 관계성의 환상이 자라날 틈이 없이 거의 기능적으로 작동하고, 그런 이들 사이에는 꼼꼼히 배치된 불만이, 곧 총체적인 화해불가가 자리 잡는다. 한데 어떤 유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도 알듯 결국 모가디슈에서의 탈출을 위한 이들의 연대는 가능해진다. 분명 한신성(김윤석 분)의 강력한 선의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


"여기서 태준기가 하필 차 안에서 죽었다는 게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씨네21》의 김철홍과 안시환은 이 영화 속의 시각성을 보지 않는 것의 제스쳐에 국한해 남한의 이미지들에 유혹되지 않도록 아이들의 눈을 가리는 북한의 어른들, 치안의 눈길 곁에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캐릭터들의 제스처만을 분석하지만, 이 제스처가 속한 어떤 연쇄를 더 파고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견해는 적잖이 미심쩍다. 어떤 연쇄? 차창 밖을 향하는 시선들. <모가디슈>의 곳곳에는 보지 않는 것과 함께 보는 것이 이야기에 곧바로 녹아들지 않는 '물질적'인 제스처로서 꼼꼼히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보니 <모가디슈>는 자동차에서 시작해 자동차에서 끝나는 영화가 아니던가?"


"문명화의 과정이 개인과 개인(들)의 사적 폭력이 완화되고 통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법과 제도들을 통해 폭력을 '정당히' 독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국가는 인민 개개인의 존엄을 과도하게, 하지만 무력 없이 침해할 때에조차 (법과 제도들이 설정한)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었다. (불과 두 정권 동안 남한의 우리는 냉정한 태만함과 선택적인 강건함 모두를 '정당함'의 이름 아래서 겪은 바 있다) <모가디슈>에서 이런 국가폭력은 직접적인 무력으로서의 국가폭력(소말리아 내전)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몇 겹에 걸쳐 캐릭터의 미시적인 행동과 사건에 삼투해 영향을 행사하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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