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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l 27. 2022

<헤어질 결심>, 2022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헤어질 결심>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제게 납득되지 않는 건 <헤어질 결심>의 수많은 '시차'들이 대체 무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번역기를 통한 대화, 어딘가는 눈이 오고 어딘가는 안개가 자욱한 날씨의 차이, 시각적 이미지와 어긋나는 보이스-오버, 한 숏에서 교차하는 복수의 시간선, 모니터로 재현되는 숏-리버스 숏 구도, 엇박자의 플래시백, 사물의 시점 숏 등 <헤어질 결심>에는 그동안 박찬욱의 영화에서 볼 수 있던 '시차'들이 아주 과시적으로 제시 및 중첩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중첩은 어지럽기 짝이 없는 오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죠.("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돌이켜보면 박찬욱의 '시차'는 관점주의즉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을 한 번에 통제할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질서 따위란 없다는 일차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건에는 언제나 복수의 기반이 블록처럼 쌓여있고(<올드보이>, <박쥐>, <아가씨>의 저택의 구조) 그래서 사건은 인물들의 의도를 '영원히' 빠져나가 인물들의 뒤통수를 칩니다(이른바 '복수 삼부작'의 결말). (그러니 박찬욱을 두고 '과하게 탈역사적'이라며 비판하는 건 사실 포인트를 아예 잘못 잡은 거죠. 애초에 박찬욱의 세계관이 그렇게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전혀 타격감이 없는 비판일뿐더러, 사실 박찬욱의 영화는 '과하게 탈역사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적당히 역사적'이려고 해서 의심스러운 건데 말이에요) 그 점에서 <헤어질 결심>은 어그러진 사랑의 영화가 아니라 어그러진 세계 속에서의 사랑의 영화라 해야겠죠. 아니, 정확히는 그런 영화가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헤어질 결심>의 '시차'들은 그런 어그러진 세계를 직시하고 경험하는 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저는 <헤어질 결심>의 '시차'들이 정녕 무얼 묘사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을 정도에요.


'시차'의 묘사는 넘쳐나고 그래서 영화가 화려해지긴 하는데, 그건 미학적 프로그램상 필요해서 쓰이는 게 아니라 그냥 쓰일 뿐입니다. 기계의 시점(-픽션)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게 그 자체로 가치를 갖나요? 아니죠. 영화 말미의 '무너지고 깨어짐' 녹음 파일이 (해준의 POV에서?) 동영상 파일로도 보이는 이유가 대체 뭔지 누군가 납득시켜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프로그램을 앞서는, 묘사하지 못하는 묘사들만 있을 뿐이죠. 달리 말해 이 영화의 태도는 '시차'를 간극이 아니라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간격으로만 향유하려는 거에요. <헤어질 결심>은 세상을 '단일한' 것으로 여기는 상투적인 삶의 감각을 주의 깊게 해체하면서 사랑의 조건을 직시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세계는 어그러져있다'고만 줄창 외치는 고장난 라디오 같은 영화입니다. 심지어 스스로 산산이 해체되어있기도 하죠. "불륜미화" 같은 하등 쓸모없는 신소리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헤어질 결심>은 올해의 졸작으로 꼽는 데에 손색이 없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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