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비평모임의 진행을 위해 각 주차마다 쓰고 공개했던 기조 발제 격의 리뷰들이 있다. 그중 몇 가지는 블로그들에 공개했고, 몇 가지는 다른 큰 글의 일부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내 하드 드라이브 속에 숨어있다. 이 나머지에 속하는 리뷰 중 쪽프레스/고트에서 낸 만화들에 대한 것을 고르고 다듬어 이번에 쪽프레스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 각각 「세계의 키미 – 『키미: 늙은 개 이야기』」, 「치명적인 조명 – 『나이트 피셔』」, 「더불어 불편한 삶 – 『킬링 앤 다잉』」, 「오카자키의 안티 포스트 모던」으로, 제목에서 짐작했겠지만 앞의 3편은 <윤아랑의 문화읽기 - goat 그래픽노블을 중심으로>에서, 뒤의 1편은 <오카자키의 뒷모습>에서 쓰고 발제했다. (그리고 이 중 「오카자키의 안티 포스트 모던」은 지난 1월 21일부터 2월 24일까지 독립서점 땡스북스에서 열린 쇼윈도 전시 《우리는 모두 잊어버리네 : 오카자키 교코 특별전》에 프린트되어 배치되는 식으로 선공개되었다)
이 리뷰들에서 당신은 "반복 운동으로서 존재-하기(be-ing)"에 대해(『키미: 늙은 개 이야기』), "만화로 어둠을 연출하는" 일의 곤란에 대해(『나이트 피셔』), "우리가 마냥 이해할 수도 마냥 거부할 수도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불편한 감각"에 대해(『킬링 앤 다잉』), "신체와 기호를 엄밀히 구분 짓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오카자키의 안티 포스트 모던」) 그리고 이들에 대한 만화(가)들의 다양한 대응 방식에 대해 곱씹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모든 글 하단에는 본문에서 언급된 만화의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으니 꼭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이 리뷰들을 다듬어 게재한 것은, 물론 저 만화들이 좀 더, 혹은 종래와 다른 방식으로 조명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이유로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만화평론에서 쓰일 수 있는 툴(Tool) 몇 가지를 사람들에게 좀 더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이 글들이 만화평론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당신께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번에도 쪽프레스와 지금껏 만화비평모임에 참여해주신 여러 멤버분들께 감사드린다. 아래는 각 리뷰들의 링크이다.
"여기서 거칠고 두드러지는 검은 펜선들은 숲과 해저의 윤곽이 되고, 그림자가 되고, 디테일한 형상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을 닐소는 여기서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거예요. 19쪽에서 키미는 "난 단순한 존재야. 단지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문장은 『키미』의 모든 그림에 해당되는 진술이 아니던가요? 즉 숲을 이루는 선과 캐릭터를 이루는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책 속의 모든 페이지를 이루고 또 메우는 동일한 형식의 펜선이 일관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키미』는 문자 그대로 ‘선으로 이루어진 숲’이자 ‘숲으로 이루어진 선’의 묶음이 됩니다. (...) 달리 말해봅시다. 숲이나 해저라는 배경이 키미를 포함한 형상들에 선행하거나, 키미라는 캐릭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준비된 게 아니라, 형상과 배경이 서로 구분 불가능한 방식으로 출현했다 분산했다 소멸했다 하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반복하건대, 순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아니라 "출현했다 분산했다 소멸했다" 한다는 게 중요한 지점입니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갈팡거리면서도 격렬한 각각의 반응들이 여기서 기민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응이라고 해서 해결책이나 대응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요, 삶의 부자유가 두드러지는 순간에 즉각 나타나는 무조건 반사의 행동에 가깝죠. 「원예조소」 25쪽에서 신음과 함께 "그냥 무너져가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해럴드나, 「칩임자들」 116~118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린 침입자와 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선(先)침입자 주인공처럼 말이죠. 게다가 토미네는 이런 반응을 철저히 건조하게 연출합니다. 「고! 아울스」에서 여러 사건들이 ‘서사적으로’ 긴밀히 엮이는 대신 성기고 단편적으로 툭툭 이어지는 것처럼, 맥락 설명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생략을 쭉 밀고 나가는 겁니다. 『킬링 앤 다잉』 전반의 이러한 생략은 (「앰버 스위트」를 제외한) 작품들의 강박적인 대칭적 칸 배열 속에서 잔혹함의 효과를 얻습니다. 만화의 형식으로 인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투명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는 데서 오는 잔혹함 말입니다."
"어떤 대상을 역사화하는 일은 그것을 제작 당시 사회의 일부로 바라보는 걸 넘어 거기에 얽힌 (예컨대 상당한 시차 속에서 대상들 사이에 깊은 유사성이 발견되는 식의) 혼탁한 시간성과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아톰의 명제’에 대해서도 오카자키를 통해 어느 정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요. ‘기호성’과 ‘신체성’이 병립하는 만화 캐릭터의 성질이 패전에 따른 ‘성장 불가능’의 (무)의식과 결합하여 성장을 고민하는 전후 만화를 이룬 게 아니라, 애초에 신체나 삶이 그 자체로 (‘현대 일본’을 떠나) 늘 기호적이고 형식적인 대상이었으며, 외려 패전(과 결부된 현대화) 이후란 시공 속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적’ 불안이 표출되고 과대표화된 장이 전후 만화였다고 말입니다."